[손해용의 시선] 커지는 세부담, ‘물가연동 세제’ 고민할 때
지난달 종합소득세(종소세) 신고·납부가 이뤄지면서 “예상치 못한 세금이 떨어졌다”며 당황해하는 납세자들이 많아졌다. 국세청 홈택스 PC 홈페이지로의 접속이 지연될 정도였다. 지난해 종소세 확정신고 인원은 1028만명. 4년 전보다 48.8%나 늘었다. 올해는 이보다 더 늘어나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직장인의 연말정산 소득공제는 지난 2월 끝났지만 사업소득이나 임대소득, 연간 2000만원이 넘는 이자·배당 소득 등이 있다면 종소세를 내야 한다.
여러 배경이 있지만, 연간 2000만원이라는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11년째 그대로인 점이 주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2013년 3134만원에서 지난해 4725만원으로 51% 오르고,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도 20%나 상승했는데, 과세기준은 요지부동이니 구조적으로 과세 대상이 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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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가·소득 크게 뛰었는데
과세기준 10여 년째 그대로
중산층엔 ‘소리 없는 증세’
」
국가가 근로자 월급에서 다달이 원천징수해가는 근로소득세(근소세)도 그렇다. 세율 24%를 적용받는 상한선인 과표 8800만원은 2010년 이후 그대로다. 물가 상승에 따라 실질임금이 줄어도 명목임금이 높아진 만큼 내야 하는 근소세는 불어난다. 근소세가 ‘소리 없는 증세’로 불리는 이유다.
이뿐이 아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에서 자녀에 대한 소득공제액은 1인당 150만원으로 2009년부터 16년째 고정돼있다. 주요 선진국이 출산 장려를 위해 물가 상승 폭 이상으로 공제액을 늘려온 것과 대비된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도 1997년 45%에서 2000년 50%로 인상된 이후 멈춰있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제 한국에서 상속세는 부자만의 문제가 아닌, 중산층도 부담해야 할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재정견인(財政牽引·fiscal drag)’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쉽게 말해 물가 상승이 납세자를 더 높은 세율 구간으로 ‘견인’해 세율을 올리지 않고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인플레이션율보다 낮게 조세구간을 올리는 것은 조용히(by stealth) 실제 세금을 올리는 정치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2023 ‘Taxing Wages’ 보고서)이라고 했다. OECD는 다양한 세액공제를 적용받는 저소득 가구가 재정견인에 특히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도 세제가 물가·소득 변화를 따르지 못하다 보니 각종 경제적 부작용을 양산한다. 납세자가 내야 할 세액이 커지고, 세금부담 구조가 왜곡되며, 납세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물가연동 세제’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도입한 소득세 물가연동제가 대표적이다. 과세표준 구간이나 각종 공제제도 등을 물가상승률에 연동한다. 명목소득이 올라도, 세 부담 기준을 함께 같은 비율로 조정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세 부담 증가, 형평성의 왜곡 등을 방지할 수 있다.
그간 한국 정부도 이 제도 도입을 여러 번 검토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기준을 그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 반대로 이걸 건드리면 부자들이 세금을 상대적으로 덜 내는 역진성이 커진다”(기획재정부 고위 관료 A)는 딜레마 때문이다.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물가가 오르면 자연스럽게 세수가 늘어난다. 그런데 물가 연동제를 도입하면 고소득자 위주로 세수 감소가 이어질 수 있다”(기재부 고위 관료 B)는 점도 고려했다. 세수의 안정성과 징세의 편의성을 앞세우는 얘기들이다.
물가연동 세제는 경제의 버팀목인 중산층의 생활 안정을 위해서라도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에서 물가 상승세는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고령화로 각종 사회보험료 부담도 크게 늘었다. 실질 세후소득 감소를 방지하고 소비 침체를 막는 방안으로도 물가연동 세제는 효과가 있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물가지수에 소득 세제가 연동되는 것을 미리 준칙으로 정해 시행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가파르게 진행될 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을 완충해주는 역할도 한다. 경기 활성화를 위한 감세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졍책기조와도 박자가 맞아떨어진다.
다만 먼저 각종 비과세 감면 제도를 두루 손봐야 한다. 예컨대 근로소득자 중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내는 면세자의 비율은 33.6%(2022년 기준)로 미국(30.9%), 일본(17.3%) 등에 비해 높다. 서민·중산층의 혜택은 넓히되, 국민개세(國民皆稅: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낸다)주의에 따라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정교한 세제 재설계가 이뤄져야 한다.
손해용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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