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형의 슬기로운 조직생활] 디지털 원주민에게 재량권을
AI 기술이 생활 속으로 완전히 정착된 가까운 미래.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인해 사회에서 고립되고 상처받는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어린이 AI 로봇, 민지-1001. 민지는 자신을 보물이라고 부르며 사랑해주었던 할머니를 추억하는 과정에서 할머니가 자신이 진짜 손녀가 아니라 AI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지난 5월 AI디자인학과 학생들의 과제작 전시행사에서 본 5분짜리 작품 ‘민지-1001’의 내용이다.
20여편의 과제작이 선보였는데 영상 속 인물, 배경, 음악, 대사, 스토리, 그리고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AI로 만들어졌다. 영상이 끝나면 배우나 감독의 이름 대신 여러 AI 제작 도구의 이름이 자막으로 떠오른다. 국민대 AI디자인학과는 올해 2학년이 되는 학생들이 첫 기수인 신설학과다. 입학한 지 1년이 갓 지난 학생들의 작품이지만 놀라운 창의력과 상상력을 보여주어 언론에도 조명되었고, 한 작품은 SK빌딩 외벽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초대받기도 했다. 아마 다른 대학에서도 AI 관련 학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겠다.
■
「 MZ세대 디지털 역량 선배 능가
기존 방식 강요는 신세대 무력화
‘선배는 방향, 후배는 실행’ 분담
중요한 건 변화에 적응하는 마음
」
전시회에서 만난 교수에게 AI 첨단 소프트웨어들을 어떻게 익히고 어떻게 지도하느냐고 물었다. “툴(tool)은 학생들이 훨씬 잘 사용합니다. 학생들이 새로운 툴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르고 혼자서도 잘 배우기 때문에 굳이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 교수들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컨셉을 잡고 메시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옆에서 코칭하고 지도합니다.”
디지털 마케팅 회사 대표가 AI를 사업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업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 기존 구성원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변화시키고 학습시킬 것인지가 늘 고민이라고 했다. 5년 전쯤 기대주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그 사원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가 당시로서는 생소한 프로그램이었다. 신입사원은 자신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프로그램 대신 선배들의 요구에 따라 파워포인트에 적응해야 했다. 자신이 쓰던 도구에 비해 기능이 좋지 않은데도 ‘왜 꼭 파워포인트를 써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던’ 신입사원은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다. 선배들의 우려 섞인 피드백도 뒤따랐다. 이후 업계의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면서 신입사원이 사용하던 프로그램이 대세가 되었다. 대표는 만약 당시 팀장이나 선배들이 신입사원이 사용하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단지 특정한 소프트웨어를 몇 년 빨리 도입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 속도를 감지하고, 그에 적응하려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최초의 디지털 원주민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환경에서 밀레니얼은 후배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능력’에서 선배 세대를 추월한다. 부분적으로 역량의 역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차원이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는데다 밀레니얼보다 더 원주민인 Z세대가 조직에 진입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수록 디지털 원주민 후배와 디지털 이주민 선배 사이의 ‘역전 현상’은 뚜렷해진다. 조직의 막내로 갈수록 디지털 적응력에 관한 한 선배 세대보다 더 유능하다는 의미다. Z세대는 디지털 세상의 작동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있으며 온라인을 통해 혼자 학습하는 데 능숙하다. 조직의 ‘신입’일지 모르지만 디지털에 관한 한 노련한 ‘고참’이다. 선배의 일하는 방식을 고집하며 강요하다간 자칫 디지털 원주민 후배들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선배와 후배가 어떻게 협업하면서 성과를 낼 것인지에 대해 정립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결정권을 행사하며 성장한 원주민들이 조직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선배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위의 사례에서 보듯 교수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이나 개념 설정에 대해 코치하면서 큰 울타리를 쳐주고 학생은 디지털 세상에서 마음껏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조직의 전략적 방향성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는 회사 사정을 더 잘 아는 선배가 주도하되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후배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에게 재량권을 주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해보자.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에는 실행의 자율성을 과감하게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일의 의미, 취지, 방향성을 세심하게 코칭하면서 디지털 원주민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자. 그것이 선배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길이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대 교수·대외협력처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할머니도 월 400만원 번다…경단녀가 찾은 제2의 직업은 | 중앙일보
- "개XX야" 교감선생님 뺨을 때린 초3…학교 7번 옮겨다닌 사연 | 중앙일보
- 명의는 “거세” 21번 말했다…50대 되면 이 검사 필수다 | 중앙일보
- "성형해서라도 이건 만들라"…주역 대가의 돈 부르는 관상 | 중앙일보
- 샤넬·디올 그날 무슨 일…김 여사와 2년 대화 담긴 '최재영 톡방' | 중앙일보
- "포르노 보는 것 같았다"…마돈나 콘서트 관객, 소송 제기 | 중앙일보
- "싸이 온다" 수만명 몰리는데…주막 머무르며 춤춘 전북경찰청장 | 중앙일보
- "헬스하다 죽을 뻔, 콜라색 소변 봤다"…훈련병도 앗아간 이 병 | 중앙일보
- [단독] 대학생 94% "독방 달라"…권익위 '기숙사 1인실화' 권고 | 중앙일보
- 입도 못 맞추던 아마존 부족…'머스크 인터넷' 접한 뒤 음란물 중독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