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유령 놔두면 현재 억눌러”…일본 태평양전쟁 때린 전시회

권근영 2024. 6.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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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예술가 호추니엔의 ‘호텔 아포리아’(2019)는 검은 다다미가 깔린 6개의 방에서 보는 가미카제 관련 영상 설치다. [사진 아트선재센터 ]

#1.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50명 넘는 일본의 시인·사진가·철학자·감독·배우 등 문화인들이 선전에 동원돼 접경지에서 ‘문화전쟁’을 실행했다. ‘후쿠짱’ 캐릭터로 이름난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1909~2001)도 선전부대의 일원으로 인도네시아로 파견됐다. 그는 1944년 최초의 해군 선전물 ‘후쿠짱의 잠수함’을 제작했다. 만년의 인터뷰에서 전쟁 때 일을 묻자 요코야마는 “그건 모두 사소한 일이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답했다.

#2.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1903~63)는 1943~46년 싱가포르에 있었다. 일본군은 1942~45년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선전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였지만, 제작이 무산됐다. 오즈는 이 기간 ‘시민 케인’ 등 일본군이 압수한 미국 영화를 보며 테니스와 수영을 즐겼다. 이후 오즈가 만든 영화에는 전쟁의 상흔이 녹아 있다. 그의 묘비에는 딱 한 글자만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無(무)’.

호추니엔

어두운 전시장에 6개의 작은 방, 바람을 일으키는 거대한 팬이 설치됐다. 검은 다다미가 깔린 방마다 일본의 오래된 여관 모습, ‘만추’(1949) 등 오즈 감독의 영화 장면, 욱일기에 경례하는 후쿠짱의 모습이 담긴 요코야마의 전쟁기 애니메이션, 가미카제 부대와 관련된 기록 사진 등이 상영됐다. 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호추니엔(48)의 ‘호텔 아포리아’(2019)다.

서울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호추니엔의 첫 한국 개인전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가 8월 4일까지 열린다. 지난 3일 전시장에서 만난 호추니엔은 “오즈와 달리 요코야마는 자신의 유명한 만화 캐릭터를 군국주의 캐릭터로 변형했다. 두 개의 스크린을 통해 두 사람이 내린 선택지를 함께 놓고 바라보게 했다”고 설명했다. ‘아포리아’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공존하기에 어느 하나를 진실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를 뜻하는 학술 용어다. 제목 그대로 여러 삶을 관조하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웠던 ‘아시아성’에 대한 비판만큼은 날카롭다.

다시점 연극과도 같은 이 작품의 시작은 2019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였다. 국내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묘사한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싼 검열 논란으로 기억되는 국제 미술제다. 트리엔날레 측은 호추니엔에게 이 지역의 전통 여관인 기라쿠테이에 전시할 작품을 의뢰했다. 호추니엔은 이곳이 가미카제 특수부대와 연관된 장소였음에 착안해 ‘호텔 아포리아’를 완성했다. 기라쿠테이에서 출발해 가미카제, 대동아공영권, 동남아에 선전 부대원으로 주제를 발전시켰다. 일본인 큐레이터·번역가 등과 자료 조사를 하며 주고받은 편지를 일본어 내레이션으로 영상에 흘렸다. 감정이나 해석 없이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글이다.

호추니엔은 “역사를 다루는 이유는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과거의 유령을 직면하지 않으면, 다양한 형태로 돌아와 우리를 억누른다”고 말했다. 영상 속 인물은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작가는 “빈 얼굴은 아무도 아니면서 모두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을 거기에 투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존재들을 데려와 현재에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추니엔은 주목할 만한 현대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 2024’를 수상했다. 아시아를 하나로 묶으려던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오늘의 거울로 삼는 그의 작품이 아시아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선 싱가포르미술관·아트선재센터 등이 공동 제작한 신작 ‘시간의 T(T for Time)’와 ‘타임피스(Timepieces)’도 선보인다. 지하 아트홀에서는 ‘미지의 구름’(2011) 등 작가의 구작 네 편이 상영된다. 관람료 성인 1만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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