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나가란 할머니 유언, 금메달로 지켜야죠”
“올림픽이 빨리 열렸으면 좋겠어요. 요즘 같아선 이 두 손으로 누구든 메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파리올림픽이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재일동포 유도 국가대표 허미미(22·세계랭킹 3위·경북체육회)는 손가락에 칭칭 감은 테이프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챔피언’다운 자신감이었다.
허미미는 지난달 21일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2024 세계선수권 여자 57㎏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일본 세계선수권에서 정성숙(61㎏급)과 조민선(66㎏급)이 동반 우승한 이후 한국 여자 선수가 이 대회에서 금을 딴 건 29년 만이었다. 남자부까지 범위를 넓혀도 2018년 아제르바이잔 대회 때 안창림(73㎏급)과 조구함(100㎏급) 이후 한국이 6년 만에 수확한 금메달이었다.
올해 세계선수권은 다음 달 26일 개막하는 파리올림픽의 전초전으로 불렸다. 한국의 대표적인 ‘효자 종목’ 유도는 침체에 빠진 상태다. 최근 두 차례 올림픽(2016 리우·2020 도쿄)에서 잇달아 ‘노 골드’에 그치며 자존심을 구겼다. 유도 종목에선 2012 런던올림픽 때 김재범(81㎏)과 송대남(90㎏급)이 마지막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여자 유도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조민선) 이후 무려 28년간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허미미의 파리올림픽 전망은 밝은 편이다. 이번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허미미는 올림픽에서 2번 시드를 받는다. 세계랭킹 1위인 크리스타 데구치(29·캐나다), 일본의 에이스 후나쿠보 하루카(26·세계 7위) 등 껄끄러운 상대를 초반에 만나지 않는다. 지난 4일 용인대 훈련장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허미미를 만났다. 허미미는 “최근까지만 해도 ‘올림픽에 나가면 잘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세계선수권에서 강자들을 꺾고 금메달을 따고 나니 자신감이 커졌다. 좋은 대진은 덤”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생애 첫 올림픽인 데다 태극마크를 달고 뛰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낀다. 꼭 금메달을 따서 한국 유도의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덧붙였다.
허미미는 이날 남자 선수 황혜성(20·용인대)과 도복 깃을 맞잡고 구슬땀을 흘렸다. 허미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난 데다 국내에선 여자 유도의 선수층이 얇은 탓에 남자 선수를 훈련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남자 선수와 훈련하는 이유는 또 있다. 허미미는 기술과 체력은 세계적 수준인데 키가 작은 편(1m59㎝)이다. 체격과 힘이 좋은 유럽이나 몽골 선수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웬만한 남자 선수도 버거워할 만큼 힘이 좋은 몽골의 ‘여전사’ 엔크흐릴렌 르카그바토구(26)가 허미미의 대표적인 천적이다. 허미미는 이 선수와 3차례 맞붙었는데 모두 졌다. 그런데 키 1m68㎝의 남자 60㎏급 청소년 대표 출신 황혜성이 ‘가상의 유럽·몽골 선수’ 역할을 맡는다.
허미미는 한국 유도에 혜성처럼 나타난 ‘특급 신예’다. 200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허미미의 아버지는 한국 국적, 어머니는 일본 국적이다. 조부모는 모두 한국 출신이다. 일본 유도의 특급 유망주였던 그가 한국 땅을 밟은 건 2021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손녀가 꼭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돼 올림픽에 나갔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할머니의 뜻에 따라 허미미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그해 경북체육회 유도팀에 입단했고, 이듬해인 2022년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2년간 각종 국제대회에서 8차례나 우승하며 한국 유도의 간판으로 우뚝 섰다. 현재 일본 명문 와세다대(스포츠과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충북 진천선수촌을 오가며 훈련 중이다.
이중국적자였던 허미미는 지난해 12월 21세 생일을 맞아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허미미는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딴 뒤 가장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금메달을 걸어드렸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허미미가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년) 선생의 후손이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허석은 일제강점기였던 1918년 경북 지역에 항일 격문을 붙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던 독립투사다. 허미미는 “언제부턴가 내 이름 앞에는 항상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말이 붙더라. 세계선수권에선 애국가를 듣기만 했는데, 파리에선 꼭 금메달을 따낸 뒤 애국가를 또박또박 따라 부르겠다”고 했다.
■ 허미미
「 생년월일 2002년 12월 19일(일본 도쿄)
소속 경북체육회, 와세다대 스포츠과학부(4학년)
체격 1m59㎝, 57㎏
체급 여자 57㎏급
세계랭킹 3위
주특기 업어치기, 굳히기
주요 성과 2017 전일본중학선수권 금, 2023 청두 유니버시아드 금, 2024 세계선수권 금
특기사항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의 5대 손
」
용인=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러면 늙어서 쫄딱 망한다" 재미교포 놀란 한국 낭비벽 | 중앙일보
- "성욕이 뇌 지배했냐"…만화카페서 음란행위한 중년커플 충격 | 중앙일보
- 꼬박 7시간 100쪽 고쳐쓴 尹…“밥 먹자” 버너로 찌개 끓였다 | 중앙일보
- 박수홍 형수 눈물 "딸 너무 힘들어해, 정신과 치료 받는다" | 중앙일보
- '9년째 불륜' 홍상수·김민희 또 일냈다…'수유천' 로카르노행 | 중앙일보
- "이러다 대형사고 터진다"…요즘 성수역 퇴근시간 충격 장면 | 중앙일보
- "누나 인생 망치게 한 것 같아"…'낙태 강요' 야구선수 녹취 공개 | 중앙일보
- "월 400만원씩 외가에 지원"…그리 고백에 아버지 김구라 깜짝 | 중앙일보
- [단독]"VIP 표현 부풀린 것"…임성근 구명설 '멋쟁해병' 5인의 입 | 중앙일보
- 이래서 수수료 올렸나…배민, 한국서 벌어 독일 4000억 퍼줬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