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 무너뜨린 바이오 ‘빌런’들
정보 불균형의 늪…투자자는 발만 동동
신약 개발 성공률은 10% 미만이다. 임상 3상까지 가도 성공 확률은 절반이 채 안 된다고 알려졌다. 이마저도 시간과 비용이 충분히 투자됐을 때 얘기다. 이쯤 되면 신약 개발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에 가깝다. 그런데 왜 투자자들은 임상 실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분노하고 시장은 ‘폭락’으로 반응할까. 국내 신약 개발 역사에 답이 있다. 임상 실패 때마다 석연찮은 지점들이 있었다. 바이오 산업이 ‘꿈’을 먹고 산다지만, 의구심 가득한 실패에 자애를 베풀 투자자는 없다. 임상 정보를 애매모호하게 공유하고, 지나치게 성공을 호언장담하는 ‘허풍’이 K바이오의 25년 바이오 역사의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단골손님 HLB부터 신라젠까지
최근 HLB 사태가 투자자에게 큰 충격을 줬다. FDA 승인을 자신했지만 거부당하며 또다시 먼 길을 걷게 됐다. 투자자 역시 ‘멘붕’에 빠졌다.
이처럼 바이오 투자자들이 잊고 싶은 기억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라젠 사태’가 대표적이다. 신라젠은 2006년 부산대 의대 연구진이 임상시험을 위해 설립한 산학협력 기반 바이오 벤처로 출발했다. 7년 뒤인 2013년 치과의사 출신 문은상 대표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그다음 해 항암 바이러스 면역 치료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 바이오 기업 제네렉스를 인수합병(M&A)했다. M&A와 연구개발에 막대한 돈이 필요한 상황. 문 대표의 영업력이 빛을 발했다. 신라젠은 전국 의사들을 주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사들이 믿고 투자한 회사’라는 이미지는 상장 과정에서 투자자 유치에 다시 활용됐다. 이후 신라젠은 간암 치료제 ‘펙사벡(Pexa-Vec)’을 앞세워 기업가치를 끌어올렸다. 자금 확보를 위해 전환사채(CB)를 발행하며 ‘임상 실패 시 약정금리 2배 인상’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펙사벡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장에서 종종 임상 실패 루머가 돌았지만 문 대표의 ‘확신 시그널’을 본 투자자들은 이를 ‘뜬소문’으로 치부했다.
신약 개발의 꿈에 베팅한 쌈짓돈들이 몰렸고 신라젠 사태가 터진 2019년 기준 신라젠 소액주주 지분은 전체 80%를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글로벌 임상 3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주식 시장은 공포에 빠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닥 시가총액 1조원(8월 1일 기준)이 넘는 바이오 기업 9곳 시가총액이 신라젠 사태 이후 4거래일 만에 5조원 넘게 증발했다.
2013년 젬백스 사태 때도 그랬다. 당시 젬백스앤카엘은 췌장암 백신 ‘GV1001’의 임상 3상을 진행했다. 결과 발표 2개월 전부터 시장에선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마다 젬백스 측은 “거짓된 소문”이라며 반박, 성공을 자신했다. 하지만 2013년 6월. 임상 3상 실패 소식이 전해졌다. 주가는 급락했다. 2013년 6월 3일 3만7700원이던 젬백스 주가는 바로 다음 날인 4일 3만2050원으로 떨어졌고 4일부터 10일까지 4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다. 이에 젬백스는 GV1001을 “백신이 아닌 소염제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백신을 소염제로 쓴다는 건, 사실상 면피용 발언에 불과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거짓의 역사’
‘줄기세포 → 신약’ 껍데기만 달라졌다
국내 바이오 역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줄기세포다. 특히 2000년대 국내 바이오는 줄기세포 신드롬에 빠졌다. 이를 이끈 건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다. 2005년 황우석 전 교수는 인간 난자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배아줄기세포는 모든 조직을 재생할 수 있는 세포를 의미한다. 학계는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정부도 다를 바 없었다. 황 전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을 바이오 테크놀로지 메카로 만들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2005년 12월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사실을 바로잡았다. 황우석 전 교수의 발표가 모두 ‘사실무근’이라는 설명이었다.
신약 개발 역사에도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게 2019년 코오롱생명과학 ‘인보사 사태’다. 2019년 3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미국에서 임상시험 중인 골관절염 치료제 인보사에서 연골 세포가 아닌 변형 신장 세포가 나와 판매 중단 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7월 식약처 허가 이후 438개 병·의원에서 3707건이 이미 투여된 뒤였다. 문제는 회사 측이 문제를 알고도 허위 자료를 제출해 식약처로부터 판매허가를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다.
2019년 헬릭스미스는 미국에서 진행하던 당뇨병성 신경병증 유전자 치료제 ‘엔젠시스(VM-202)’ 임상 3상이 실패했다고 밝혔다. 당시 헬릭스미스가 밝힌 임상 3상 실패 이유는 황당무계하다. 위약과 약물이 뒤섞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투자자들은 진의를 의심했다. 임상시험 과정에서 위약과 진짜 약물을 구분해 투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신약 개발 회사가 이를 어겼다는 변명을 듣고 “실패 이유를 조작, 의도적인 거짓을 전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특히 문제 되는 부분은 당시 오너 일가의 사전 인지 여부다. 헬릭스미스 최대주주 일가는 임상 3상 발표 직전 은밀하게 지분을 매각했다. 김선영 창업자의 처남 김용수 전 헬릭스미스 대표가 중심에 있다. 김 전 대표의 부인인 이혜림 씨는 9월 23일 2500주를 평균단가 17만6629원에 장내 매도했다. 또 김 전 대표의 자녀인 김승미 씨도 평단 17만6807원에 500주를 장내 매도했다. 9월 23일 장 마감 후 재임상 실시를 골자로 한 공시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고 팔아치웠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헬릭스미스의 거짓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약물 혼용으로 인한 실패라며 해당 임상을 3-1상으로 명명하고 임상 3-2상을 추진했다. 동시에 투자자들에게는 또 한 번 약속했다. 2022년까지 FDA에 엔젠시스 당뇨병성 신경병증(DPN)은 물론이고 루게릭병(ALS)과 샤르코 마리 투스병(CMT) 등 3개 적응증 품목허가신청서(BLA)를 제출하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약속은 거짓이었다. DPN은 5년이 지난 올해 1월에야 임상 3-2상 결과가 공개됐다. 임상 결과 엔젠시스 투약군이 위약군 대비 유효성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또 임상 3상에 실패했다.
2020년 한올바이오파마 사례도 비슷한 맥락이다. 2020년 1월 한올바이오파마는 안구건조증 치료 신약 ‘HL036’이 미국 임상 3상에 성공했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한올바이오파마는 “객관적 지표인 ‘총각막염색지수(TCSS)’와 주관적 지표인 ‘증상지표(ODS)’에서 HL036이 위약군 대비 뚜렷한 개선 효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5일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올바이오파마는 “안구건조증 신약 후보물질 ‘HL036’의 임상 1차 평가변수에서는 유의성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기자간담회 직후 한올바이오파마 주가는 하한가로 직행했다.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5000억원 가까이 증발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2호 (2024.06.05~2024.06.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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