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번 기생들, 전통문화예술 계승... 콘텐츠 만들어야"

조종안 2024. 6. 5. 18: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제무용협회(CID) 한국본부 군산지부, 권번과 기생중심 포럼 오는 8일 개최

[조종안 기자]

 포럼 <K-엔터테인먼트의 원조, 군산의 권번을 찾아서> 웹자보
ⓒ 조종안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군산지부(지부장 최재희)에서 주최·주관하는 포럼, 'K-엔터테인먼트의 원조, 군산의 권번을 찾아서'가 오는 8일(토) 오후 2시 군산 장미공연장(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내항1길 57)에서 열린다.

100여년 전 지방의 항구도시에 존재했던 권번과 기생 중심 포럼은 전북 최초 아닌가 싶다. 권번(券番)은 과거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적을 두고 활동하던 조합의 명칭을 뜻한다.

일제강점기(1920~1930) 군산에는 보성(普成), 군산(群山), 소화(昭和) 등 세 개의 권번과 한호예기, 군창예기 등 두 개의 기생조합이 있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소화권번은 1928년 일제에 의해 설립됐다는 것. 따라서 경찰의 감시와 회유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권번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능 교육과 공연이 기획됐다. 인간문화재급 명창·명무도 다수 배출됐다.

중요한 대목은 우리의 전통문화 예술이 사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이 계승·보존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다양한 극장 공연과 전국 규모 명창대회에 군산 기생들이 참여한 기록이 전해지고, 소화권번의 김유앵, 이란향, 장향옥 등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단가>를 비롯해 <심청가>, <춘향전> 등 남도소리를 들려준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재희 지부장
ⓒ 조종안
 
지난 4일 만난 최재희 지부장은 "본 단체(CID-UNESCO)는 ▲ 문화예술의 국제교류 ▲ 전통문화 예술 발굴 및 전승 ▲ 춤의 대중화를 위한 커뮤니티 프로그램 개발 ▲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 공공성 확대 등이 목적"이라며 "포럼은 전통문화 예술의 국제무대 진출 및 지역의 전통춤 뿌리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전통 가무(歌舞)가 세계 무대에서 호평받는 것도 권번에서 교육받은 기생들의 땀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따라서 군산에 존재했던 권번과 기생조합은 K(군산)-엔터테인먼트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다. 권번 출신 기생들에 의해 행해졌던 가·무·악을 발굴, 미래 세대에 계승·보존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개발해야 한다."

최 지부장은 포럼을 개최하게 된 배경에 대해 "군산의 권번 역사에는 지역 근대사의 상징적 자원과 그 시대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애향 정신이 깃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이고 숨결로서 미래 세대에 전달할 만한 가치가 매우 높다"며 "목적은 군산 문화예술의 바탕이 되는 권번 문화의 정수(情髓)를 함께 느끼고 널리 알리는 데 있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들의 다양한 활동
 
 연극에 출연한 군산 기생들
ⓒ 군산 해어화 100년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일본식 근대화를 접목·이식시킨다. 권번제도 역시 그 작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기생들은 의식과 활동 면에서 조선 시대 기생과 큰 차이를 보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1895), 을사늑약(1905) 등 망국의 설움을 몸소 체험한 그들은 일제 탄압과 감시에도 민족의식은 물론 예술관, 직업관 등이 뚜렷했던 것.

일제 식민치하 기생들은 3·1 만세운동에도 앞장서 참여했고, 독립운동에 도움을 준 기생도 많았다. 그들은 예술계 아이콘이자 대중스타이기도 했다. 기생 출신 가수와 모델, 영화배우 등이 많았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통 가무를 전수한 기생도 있었고, 난(蘭) 그림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중앙지 신문에 소개되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 조선 기생들은 봉사 활동의 하나로 자신의 재능을 자선행사와 모금 운동 등에 활용했다. 일종의 '재능기부'였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 손님 환영회 때 조선의 전통 가무를 선보였으며, 공연 수입으로 수재의연금 또는 야학 운영 기금으로 내놓았다. 웃음을 팔아 번 돈을 의연금으로 내는가 하면 조선인 학교설립 기금으로 기탁했던 것.
 
 군산 영신여학원 창립 의연금 관련 기사(1922년 10월 1일 치 <동아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2년 여름 빈곤한 아동 교육에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후원회를 조직, 군산 개복동에 영신여학원(永信女學院)을 설립하였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기독교청년회에서 주도했음에도 부두 노동자, 미선공 등 조선인 수백 명이 모금 운동에 동참한 것. 특히 후원자 명단에서 군산권번, 보성권번, 군창예기조합, 한호예기조합 등에 속한 20여 명의 기생 이름도 보여 놀라웠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군산 기생들은 야학 설립, 국내외 동포 의연금 모금 연주회, 가무(歌舞) 공연, 동정음악회(불우이웃돕기 음악회) 등을 개최하거나 후원하였다. 우리물산 장려를 위한 거리 행진과 각종 성금 모금에도 앞장섰으며 조선인 야학 및 기성회, 체육회, 청년회 등 지역 단체들과 교류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군산권번 창극부 2회 공연안내 ‘군산신문’ 광고(1948)
ⓒ 군산 해어화 100년
군산 기생들은 예술 활동과 더불어 각종 캠페인, 저명인사 조문, 체육 단체 회관 건립기금 모금, 조선인학교 교사(校舍) 신축비용 지원, 이충무공 묘소 추모 성금, 자선사업 등에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했다고 한다. 권번을 비하하고 깔보는 개인과 단체에 집단으로 대처하거나, 법적 대응도 불사하는 등 주권 행사도 활발히 펼쳤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당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음이 신문 기사와 광고를 통해 나타난다. 특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동 돕기와 재외교포 의연금 모금행사 참여, 광복 후 연극단 조직 등은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는 당시 기생들은 민족의식이 뚜렷하고 전통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이었으며 실천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포럼 발제문(<K 엔터테인먼트의 원조, 군산의 권번을 찾아서>), 최재희 지부장 인터뷰로 기사를 작성했으며, 이 기사는 지역 인터넷 언론 <투데이 군산>에도 실렸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