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만병통치약, 어떻게 세계인의 음료가 됐나

이준목 2024. 6. 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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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남녀노소 국적을 막론하고 전 세계인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유일무이한 탄산음료, 바로 '콜라(Cola)'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오늘날 전 세계인의 하루 콜라 소비량만도 무려 19억 잔에 이른다고 한다. 2023년 기준 '청량음료 브랜드 가치' 기준에서 콜라의 브랜드 가치는 70조 원으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료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 콜라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이면에는 세계사를 뒤흔든 수많은 사건들이 담겨 있었다. 6월 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4회에서는 '미국의 상징 콜라는 어떻게 세계를 중독시켰나'편을 통하여 미국의 상징이 된 콜라가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조명했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콜라의 기원은 19세기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발명가이자 약제사였던 존 펨버튼(John Pemberton, 1831-1888, 코카콜라의 창시자)이라는 인물이 코카잎과 콜라나무 열매의 추출물에 와인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프렌치 코카 와인'이 오늘날 콜라의 원조다.

1860년대 미국은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이라는 참혹한 내전을 겪으며 많은 부상병과 환자들이 의약품과 치료 시스템의 부족으로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펨버튼 역시 참전하여 남부 측에서 싸웠던 군인 출신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전문적으로 검증된 일반의약품이 아닌, 판매자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매약(賣藥, Patent medicine)들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품 중에는 실제로는 악효가 전혀 없거나 심지어 마약 성분이 포함된 제품도 수두룩했다. 콜라 역시 이러한 짝퉁 매약의 일종으로 제작되어 초기에는 '만병통치약'처럼 과장 홍보되기도 했다.

1886년 애틀란타 지역에 '금주법(禁酒法, Prohibition)'이 전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승승장구하던 펨버튼의 와인 사업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에 펨버튼은 와인을 빼고 설탕과 물로 대체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콜라다. 여기서 더 나아가 펨버튼은 콜라를 더 이상 매약으로 한정짓지 않고 탄산수와 결합하여 대중들이 더 좋아할 만한 음료로 만들어내고 탄산음료 전문 매장을 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금주법 시행으로 인하여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콜라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며 대박을 터뜨린다. 콜라를 파는 탄산음료 매장은 금주법 시대 이후 술집을 대체하여 사람들에게 남녀노소 각광받는 '핫플'이 됐다. 탄산음료 매장이 도입된 지 9년만 인 1895년, 미국 전역에서 매장이 5만여 개로 크게 확산됐다.

펨버튼은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하여 콜라의 주성분인 코카 잎과 콜라 열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알파벳 C를 부각시켜 오늘날 우리가 모두 아는 '코카콜라(Coca-cola)라는 제품명을 고안해냈고, 유명한 대표 로고 역시 자신이 직접 손글씨로 완성했다. 또한 콜라를 맛과 약효를 겸비한 건강음료로 홍보한 펨버튼의 마케팅 전략도 주효했다.

1888년 콜라의 창시자였던 펨버튼이 세상을 떠나고 그가 남긴 콜라 회사를 인수한 것은 에이서 캔들러(Asa Griggs Candler Sr)라는 인물이었다. 41대 애틀란타 시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기업인이기도 했던 캔들러는, 일찌감치 콜라의 사업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2300달러(1억 원)라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에 콜라 회사와 권리를 모두 인수했다. 캔들러는 무료 쿠폰 마케팅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홍보전략을 바탕으로 콜라가 애틀란타를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콜라의 변신, 118배 증가한 매출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20세기에 접어들며 콜라를 병에 담아 판매하는 '콜라병'의 시대가 찾아왔다. 1903년에 이르러 유리병 자동화 시스템의 도입으로 콜라병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는 미국 내에서 콜라의 대중화로 이어지는 큰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꼽힌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콜라에도 위기가 함께 찾아온다. 콜라의 주성분인 코카인이 한때 신비의 묘약에서 이제는 위험한 마약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또한 미국 정부는 약의 효능을 과장하거나 허위광고를 한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순정식의약품법'을 도입하며 관련 규정을 강화했다. 이로써 콜라는 이제 매약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탄산음료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순정식의약품법이 도입된 이후, 1892년에서 1910년까지 콜라의 매출은 무려 118배로 오히려 급상승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셈이었다. 한편으로 콜라의 인기가 높아지며 비슷한 브랜드와 디자인의 모조품까지 속출했다. 이에 코카콜라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던 콜라병의 디자인과 로고를 하나로 통일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코카콜라만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콜라의 제조법은 지금도 비밀리에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코카콜라사의 창립자인 캔들러는 콜라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분 원료마다 고유의 물품번호를 붙여서 관리하게 하는 원칙을 수립했다. 코카콜라만의 고유한 맛이 나게 하는 원료를 미지수 '7X '로 표기하며 그 정체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맛 이상으로 콜라의 또다른 성공비결은, 소비자의 일상을 파고드는 뛰어난 마케팅 능력이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서며 소비주의 문화가 성행하자, 코가콜라사는 광고업자, 심리학자, 홍보전문가들을 모아 철저한 분석 끝에 광고 전략을 수립했다. 이를 통하여 탄생한 '풍요로운 소비를 즐기는 일상 속에서 콜라를 함께 즐기며 갈증을 풀라'는 코카콜라만의 광고 메시지는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를 제대로 포착했다. 콜라는 광고를 통하여 미국인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1923년에는 '패키지' 판매 마케팅이 처음으로 도입된다. 1920년대 들어 미국의 가정마다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대량의 음료를 한번에 구매하여 보관하는 것이 가능해진 데 착인한 마케팅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최초의 '자동판매기'가 보급되기 시작면서 격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갈증 해소를 위한 음료로 콜라가 더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미국인 10명 중 1명이 매일 콜라를 마신다는 집계가 나올 정도로, 콜라는 명실상부한 미국의 국민음료로 자리매김했다.

코카콜라의 겨울 공략법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또한 코카콜라사는 겨울에는 소비량이 감소하는 탄산음료의 계절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크리스마스 마케팅을 펼쳤다. 광고를 통하여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절인 크리스마스 만찬에도 콜라가 빠질 수 없는 음료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겨울에 발표된 코카콜라의 '목마름은 계절을 모른다(Thirst knows no reason)'는 전설적인 광고문구는, 콜라가 미국에서 명실상부한 사계절 음료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처럼 미국의 음료였던 콜라는 어떻게 전 세계로까지 퍼져나가게 되었을까. '2차세계대전( World War 2, 1939-1945)'이 발발하면서 세계 각지에 파견된 미군들의 보급품으로 콜라가 포함된 것이 중요한 계기로 꼽힌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군 장군이 사령부에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대량의 콜라 보급 지원을 요청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코카콜라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군에 적극 협력하며 저렴한 가격에 콜라를 납품했다. 뿐만 아니라 콜라 제작 기술고문들을 세계 각지에 파견하여 아예 현지에 생산 공장을 세우고 콜라를 만들어내며 전쟁 마케팅에 동참했다.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34개월간 미군이 마신 콜라병만 무려 30억 병에 이른다.

코카콜라사는 이미 2차대전 이전부터 수출회사를 설립했고, 전쟁 직후 세계 각지에 공장들이 건립되며 빠르게 해외로 확산되었다. 이제 콜라는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전후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선 미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 <타임지>에서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우유을 먹이듯, 지구가 콜라를 받아먹는 장면을 '월드 앤 프렌드(World & Friend, 세계는 친구)라는 제목으로 연출했는데 '전 세계에서 미국적 가치와 생활방식이 확산되고 있는 상징'으로 콜라라는 제품을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미국의 상징이 된 콜라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반응도 나오기 시작했다. 문화적 자부심이 남달렀던 서유럽 국가들은 현지 음료업계를 중심으로 콜라의 인기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특히 프랑스는 코카콜라의 현지 공장 설립을 마지막까지 강하게 반대하며 당시 언론에서는 '콜라의 식민화', '미국문화의 강제 주입'으로 규정할 정도로 견제했다. 하지만 1953년 콜라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판결이 나오자 프랑스도 결국 공장설립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콜라 갈등은 '오랜 전통의 문화(유럽)'와 '천박한 물질문화(미국)'로 대표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립구도의 상징이 됐다.

한편 코카콜라가 독점하던 콜라 시장은 펩시(PEPSI)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98년 8월 약사인 케일럽 브래덤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래드의 음료'라는 소화불량 치료용 매약으로 개발하며 그 기원이 코카콜라와 유사하다.이후 소화효소 펩신(Pepsin)의 영향을 받아 제품명을 지금의 펩시콜라로 개명했다.

펩시는 1930대 미국의 경제대공황 시기에 코카콜라보다 저렴한 가격에 두 배의 양을 담은 가성비 마케팅 전략으로 승승장구하며 코카콜라의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냉전(Cold wa, 1947-1991) 시대를 맞이하여 펩시콜라의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1959년 소련에서 열린 미국전시박람회에서 당시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이 소련 지도자였던 흐루쇼프를 초청하여 펩시콜라를 권한 장면이 언론에 포착됐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콜라를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으로 여기며 철저히 배척하고 있던 시기였다. 흐루쇼프는 닉슨의 거듭된 권유에 마지못해 슬쩍 입에 댔을 뿐이지만,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미국의 대표음료인 콜라를 마시는 장면만으로 엄청난 화제가 되기는 충분했다. 사진은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펩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인 마케팅에 활용했고, 1972년에는 마침내 소련에 콜라 독점판매권까지 획득하며 승승장구하여 엄청나게 도약하게 된다.

코카콜라의 대항마 펩시콜라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콜라 패권경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코카콜라가 전 세대가 함께 즐기고 화합하는 가족적인 국민 음료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다면, 펩시콜라는 젊은 세대에 초점을 맞춘 타깃 마케팅이 더 두드러진다는 게 차이다. 펩시는 당대 최고의 팝스타였던 마이클 잭슨을 광고모델로 삼아 펩시를 즐기는 젊은 세대를 'P세대'로 규정하며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코카콜라는 펩시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콜라 제조법을 도입한 '뉴 코크'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뉴 코크는 오히려 대부분의 전통적인 코카콜라 팬들에게 큰 실망과 격렬한 반발만을 자아냈다. 당황한 코카콜라는 실수를 인정하고 두 달 만에 뉴 코크 프로젝트를 폐기하면서 기존의 맛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매출이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 이는 한편으로 그만큼 미국인들에게 코카콜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역사와 추억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음을 보여준 장면으로 불린다.

또한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독특한 경쟁구도를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상대 회사에 대한 '기업간 저격 광고'다. 두 회사는 광고에서 노골적으로 상대 제품을 직접 등장시켜 대놓고 조롱하고 폄하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한 펩시콜라 광고에서 아이가 코카콜라캔을 밟고 올라서서 자판기의 펩시 버튼을 누른다거나, 반대로 코카콜라 광고에서는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영웅 코카콜라가 덤벼드는 악당 펩시콜라들을 주먹질로 응징하고 세계를 구해낸다는 설정 등, 국내 기업에서는 보기 힘든 기발하고 파격적인 광고들이 넘쳐난다.

대중들도 양사의 이러한 디스전을 일종의 놀이 문화로 받아들이며 온라인에서 각종 패러디와 밈이 넘쳐나기도 한다. 사회유명인사들도 예외가 아닌데, 워렌 버핏이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같은 인물들은 '콜라 덕후'로 유명하다.

한편으로 콜라의 세계적인 영향력이 높아지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해외 현지에 설립된 콜라 공장들의 경우, 지하수 활용 문제와 인도나 멕시코 등에서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콜라를 장기간 과다섭취할 경우, 인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문제 제기도 계속해서 도마에 오르고 있는 부분이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하여 콜라 회사들은 당분을 줄인 제로콜라같은 새로운 제품의 개발, 현지 국가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사회참여 등을 모색하며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콜라는 콜라이며 돈을 얼마를 쓰든간에 당신은 더 좋은 콜라를 가질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똑같으며 모든 콜라는 좋은 것이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이자 콜라를 소재로 한 작품을 유독 많이 만들어냈던 앤디 워홀이 남긴 격언이다. 오랜 역사와 상징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콜라는 세계인들이 즐기는 탄산음료인 동시에, 오늘날의 미국과 현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아이콘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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