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접(接)'과 '육임제' 덕의대접주에 임명돼

김삼웅 2024. 6. 5. 14:3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동학의 교세가 확대되면서 최시형은 본격적으로 교단정비와 조직확대에 나섰다.

개접이란 각지의 도인이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집회하고 그 기간 내에 동학교리 등 진리를 연구하고 기간이 끝나면 접(接)을 파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대원군의 뒤를 이은 민씨 외척의 세도 정권이 개항에 뒤이어 군란과 정변을 겪어야 했던 그 화난 속에서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은 동요와 불안 속에서 해매이고 있는 민중 속에 동학의 교세를 넓혀갈 수 있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8] 조직 정비와 관리가 시급해져

[김삼웅 기자]

@IMG@

동학의 교세가 확대되면서 최시형은 본격적으로 교단정비와 조직확대에 나섰다. 그동안 충청·경기·강원의 산간지역을 다니며 포교하여 많은 도인이 확보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동안 흩어졌던 도인들도 각기 활동을 재개하여 모처럼 활력이 넘쳤다. <동학경전>이 은밀히 배포되면서 뜻 있는 백성 중에 동학에 입도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도인이 늘어나면서 조직 정비와 관리가 시급해졌다. 1878년 7월에 '교난' 이래 중단되었던 개접제(開接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개접이란 각지의 도인이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집회하고 그 기간 내에 동학교리 등 진리를 연구하고 기간이 끝나면 접(接)을 파하는 제도이다. 차츰 조직이 확대되면서 접(주)은 면이나 읍 단위의 책임자를 일컫게 되었다. 춘암은 1894년에 덕의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최시형은 도인 유시헌의 집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각 접의 책임자(접주)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개접의 의미를 설명한다.

오도에서 개접이라 함은 결코 유가의식과 달리 시부 등 문자로써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도를 연구하며 수련함에 있는 것이다. 

제군은 시(侍) 자의 뜻을 아는가, 사람이 포태될 때 시자의 의가 되는가, 낙지 이후 처음으로 시천추가 되는가, 입도의 날 시자의 뜻이 생기는가.

일반 치제할 때 위를 설하되 벽을 향해서 설치하는 것이 옳은가,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의 행동을 마음으로서 하는 것이 옳은가, 기(氣)로서 하는 것이 옳은가, 마음이 기를 부리는가, 기가 마음을 부리는가, 제군은 그 뜻을 연구하라.

수운 선생의 주문 삼칠(三七·三十七자)자는 만물화생의 근본을 말한 것이고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천지간궁극적인 기를 보탠 것이고, 무위이화(無爲而化)는 만물성도의 이치를 가르침이다. 그럼으로써 도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37자로서 만물 화생의 근본을 알고 수심정기로서 천지태화의 원기를 접하고 무위이화로서 만물성도의 이치를 깨닫고보면 도는 가히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도의 대운은 무한정한 운으로 수운 선생은 후천개벽의 처음임을 이르는 것이다.

도를 닦는 자는 신천(입교 전)의 탁기를 버리고 후천(입교 후)의 숙기(淑氣)를 기르면 은은한 총명이 자연 중에서 화출하는 것이다. (주석 1) 
  
1884년 10월에는 교단의 직제인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였다. 육임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교장(敎長, 자질이 알차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
 ② 교수(敎授,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③ 도집(都執, 위풍이 있고 기강이 밝으며 시비선악의 한계를 아는 사람)
 ④ 집강(執綱, 시비를 밝히고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사람)
 ⑤ 대정(大正, 공평성을 갖고 부지런하고 중후한 사람)
 ⑥ 중정(中正, 바른 말을 능히 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

동학의 이러한 활동은 정세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7월에는 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었으며, 같은 달 제물포조약이 맺어졌다. 하나같이 나라의 진운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최시형에 대한 추적이 느슨해지고, 지방의 탐관들은 그들대로 시국이 어수선한 틈에 한 몫씩 챙기느라 관심이 줄었다.

이미 교조 최제우에 의해서 교주의 지위를 이어 받은 최시형은 은밀히 교세의 만회를 꾀하여 드디어 이를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실제로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섭정하게 되면서 양반·토호에 대한 탄압, 서원의 철폐, 서학(西學)에 대한 박해, 그리고 외세 배격 등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회적 추세는 도리어 동학의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에 보다 더 유리한 풍토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대원군의 뒤를 이은 민씨 외척의 세도 정권이 개항에 뒤이어 군란과 정변을 겪어야 했던 그 화난 속에서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은 동요와 불안 속에서 해매이고 있는 민중 속에 동학의 교세를 넓혀갈 수 있었다. (주석 2)

주석 
1> 오지영, <동학사>, 120쪽.
2> 한우근, <전정판 동학과 농민봉기>, 67~68쪽, 일조각, 199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