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선 안 될 것에 주목한, 잊혀져선 안 되는 영화
[김성호 기자]
첫 책을 내고 석 달 쯤이 지났을 즈음이다. 어느 순간, 문득, 알아버렸다. 그건 깨달음과 같은 것이었다. 책이 주목받지 못했음을, 흥행하지 못했음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콘텐츠의 더미에 깔려 독자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음을 실감했다. 오래 공 들인 작업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끝나버린 건가. 허탈하기까지 한 마음이었다.
공력을 쏟은 작품이 마땅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물러날 때의 감상이란 대개 이러하다. 유명하지 않은 저자로서 영향력이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마음, 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단 분노, 수많은 무명작가들이 그 사이의 어느 지점을 오늘도 거닐고 있으리라.
책을 내고 철저한 무관심에 맞닥뜨린 여러 작가를 알고 지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어떤 박탈감과 마주한다. 단 하나의 평조차, 보도자료를 베낀 단 몇 줄 짤막한 기사도 얻지 못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이 땅의 수많은 평론가들은, 글과 책을 애호한다는 여러 평자와 유튜버와 기자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보자면 가장 긴 밤조차 짧기만 하다.
저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도 걸작이라 확신한 <순수이성 비판>을 내고 만 일 년 동안 비난에 가까운 기사 하나를 얻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 대단한 빈센트 반 고흐조차 그림 한 점 팔지 못한 채 화풍을 바꾸라는 소리나 들어야 했다. 우리는 칸트도 고흐도 되지 못하는 무명의 글쟁이가 아니냐고,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는 목소리들 사이로, 이 시대 유명한 평자들이란 모조리 유명한 이들의 작품만 뒤적거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한탄이 새어나올 때가 많았다.
▲ 가정동 스틸컷 |
ⓒ JIFF |
작은 영화제, 작은 영화들에 주목한 게 그 즈음이었다. 기고하던 계간지며 잡지조차 하나둘씩 문을 닫던 때였다. 그래도 아직은 <오마이뉴스> 같은 온라인 매체가 있어서 부족한 고료나마 이름 내건 영화평을 꾸준히 내어놓을 수 있었다. 평이 500편을 넘어서면서부터 곳곳에서 내 글을 아는 이와 마주하게 된 건 적잖이 자극이 되었다. 어느어느 영화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다거나, 그 글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좋았다거나, 또 '씨네만세'를 찾아 읽는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작은 영화제 운영위원이 달려나와 내 손을 붙든 일이 있었다. 겨우 몇백이던 정부 지원금이 반절로 줄었다고 했다. 기자며 평론가가 전혀 찾지 않아 노출 또한 되지 않던 터에 찾아주고 기사를 내주어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다큐인들이 직접 나서 맥이 끊긴 다큐축제를 복원해낸 어느 영화제도 빼놓을 수 없겠다. 첫날 행사가 끝난 뒤 가진 뒤풀이자리였던가. 어느 감독이 다가와선 제가 씨네만세를 챙겨보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엔 또 다른 감독이 다가와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며 악수를 청하였다. 언젠가 내가 평을 썼던 영화의 감독이라고, 그 평이 몹시 고마웠다고 했다.
이번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인 가운데서도 내 글이 닿은 이가 몇이나 있었다. 수시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심했던 소소한 글들이, 어느덧 700편을 훌쩍 넘은 이 시리즈가, 그래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무엇일 수 있단 걸 확인하였다. 그렇다. 누군가에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알아주는 목소리가, 몹시도 소중한 것이다. 저자로서 나와 내 친구들이 작은 관심에 목말라하였듯.
▲ 가정동 스틸컷 |
ⓒ JIFF |
<가정동>은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 지역 독립영화 쇼케이스' 섹션을 통해 두 차례 상영된 작품이다. 인천에 거주하며 인천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온 1996년 생 청년 허지윤의 21분짜리 단편이다.
이야기는 인천 서구 가정동과 인접해 있는 신도시 청라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상운(이서한 분)은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성실하게 삶을 꾸려가는 청년이다. 매일밤 늦게 일이 끝나면 상운은 제가 사는 가정동까지 걸어서 돌아온다. 가정동에서 등을 돌려 저 멀리 청라지구를 바라보면 높게 솟구쳐 오르는 공사 중인 건물들과 번쩍이는 야경이 밤하늘을 어수선하게 채우고 섰다.
영화엔 가정동의 콜롬비아 보도육교가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인천 가정동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콜롬비아 육교, 한국전쟁 당시 UN군으로 전투부대를 파병했다는 콜롬비아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콜롬비아란 이름을 붙였다 했다. 이 다리를 건너서 누군가는 출근을 하고 누군가는 퇴근을 한다. 종수(신운섭 분)도 그런 이다. 매일 아침 콜롬비아 육교를 건너 그는 가정동에서 청라까지 일을 나간다. 청라에 솟아오르는 건물을 짓는 일이 그의 업이다. 그는 일용직 노동자다.
▲ 가정동 스틸컷 |
ⓒ JIFF |
<가정동>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을 듯 보이는 두 사람 사이를 잇는 얇은 끈에 주목한다. 고깃집 알바 상운과 일용직 노동자 종수, 그들은 매일 밤과 매일 아침 가정동 골목 한 편에 걸린 화이트보드 앞에서 마주선다. 어둔 밤 지친 상운이 마주한 화이트보드엔 어김없이 시가 한 편 쓰여 있다. 그러면 상운은 그 앞에 머물며 찬찬히 시를 읽고서는 사온 담배 한 갑을 화이트보드 뒷면의 턱 위에 가만히 올려둔다.
아침이면 종수가 상운이 떠난 화이트보드 앞에 선다. 일을 나가며 그는 화이트보드 위에 시 한 편을 적어 내린다. 화이트보드 뒤에 있는 담배를 꺼내 태우면서.
종수와 상운은 한 차례도 만나지 못하지만 그들은 매일 밤과 새벽, 서로를 대면한다. 이 삭막한 도시, 고단한 노동 뒤로 그와 같은 만남이, 연결이, 나눔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이 삭막한 도시, 고단한 노동 뒤로 영화와 마주한 관객 또한 그 위로를 조금쯤 나누어 가진다.
허지윤 감독이 직접 썼다는 두 편의 시가 영화 가운데 낭독된다. 시어와 시어가, 문장과 문장이, 종수로부터 상운에게, 허지윤으로부터 관객에게, 다가서고 스며들어 마침내는 서로를 연결한다. 묶어낸다. 시가 인물과 인물 사이를 엮듯이, 영화는 감독과 관객 사이를 잇는다.
낯선 시도다. 고깃집 알바생과 일용직 노동자, 육체노동의 피로에 찌든 그들이 시로써, 담배로써 연결되는 순간은 불쑥 낯선 감상을 일으킨다. 시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어째서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취해 떠드는 손님 가득한 고깃집에도, 일용직 노동자 죽어가는 공사장에도, 시는 어째서 보이지를 않는가를.
사라져선 안 될 것이 있다는 믿음
쉽고 편한 감상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영화는 가정동과 청라를, 자본과 투기를, 가난한 청춘을, 단절된 꿈을, 그 모두를 가르고 막고 부수는 현실을 담아낸다. 청춘의 박탈감이며, 그럴수록 꿋꿋하게 저를 피워내는 낭만을, 열기를, 꿈을 조명하길 잊지 않는다.
요컨대 <가정동>은 좋은 영화다. 자본주의가 다른 모든 가치를, 미덕을, 삶의 방식을, 급기야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며 의식마저 침탈하는 세상이다. 이 같은 세상에서 '세상은 돈 때문에 망했지 / 시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다'던 영화 속 시구엔 남다른 울림이 있다.
상운과 종수의 연결이, 그들이 나눈 시어가, 담배 한 갑의 낭만이, 결코 사라져선 안 될 귀한 것이 아직은 우리 곁에 있음을 일깨운다. 적어도 한 차례 돌아보게는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더 많은 이에게 보여져야만 한다. 이 영화는 더 많은 이에게 울림을 던져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씨네만세' 743편을 <가정동>에 대한 찬사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세상엔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알려져야 하는 영화가 있다. 불행히도 세상이 이를 충분히 주목하지 않으므로, 나는 더욱 큰 목소리로 그를 전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이생진의 '시를 훔쳐가는 사람'을 말했듯이, 나 또한 존경어린 마음을 담아 <가정동>을 당신에게 소개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JIFF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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