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로 코 뚫어 '인간 소 놀음'... 기절해도 계속된 충격적 고문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눈탱이는 밤탱이가 되고, 찢어진 입술은 퉁퉁 부어, 도저히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 없는 이에게 수비대원은 달구어진 철사를 갖다댔다. 반쯤 감긴 눈이었지만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를 챈 이는 머리를 거세게 좌우로 흔들었다.
"흐흐흐."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이들은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자은면 백산리 와우마을 수비대원들이었다. 이들은 머리를 거세게 흔드는 이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달구어진 철사를 코에 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악" 하는 비명에 박장대소를 하는 이들과 입을 가리며 오열하거나 눈물을 찔끔 흘리는 이들로 마을 공회당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박장대소를 하는 이들은 와우리 수비대원이고, 오열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코가 뚫린 이의 친인척이거나 마을 주민들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평생 코뚫이라고는 소에게 하는 줄 알았던 이들에게 산 사람에게도 코를 뚫을 수도 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철사에 코가 뚫린 이는 순간적으로 혼절했다. 그렇지만 수비대 청년들은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코에 꿰인 철사를 확 잡아당겼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깨어난 이는 눈에 불을 맞은 듯 벌건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이랴." 마치 소를 몰듯 수비대 청년들은 철사줄을 흔들며 코가 꿰인 이를 앞세웠다. 코피를 바가지로 쏟으며 울음에 지친 이는 목이 쉬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칠비칠 걸었다.
'인간 소' 놀음인지 고문인지 불분명한 이 행위는 며칠 동안 이루어졌다. 와우마을에서 시작된 이 놀음(?)은 자은면 전체를 돌면서 끝맺었다. 괴기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50년 10월 중순이었다. 인민군의 진주로 후퇴한 군경이 자은면에 수복한 것은 1950년 10월 18일경이었다.
경찰이 돌아오면서 그들의 비호 아래 지역 주민들이 수비대를 조직했다. 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 완장 찬 이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자은면 수비대는 북한군 점령 시절 인민위원회에 참여하거나 심부름을 한 이들을 부역자(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편드는 사람)라고 해 잡아들였다.
코가 꿰인 이도 마찬가지이다. 자은면에서의 1948년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한 일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처형된 박종남의 아버지 박아무개는 북한군이 무안군을 점령하자 자은면 인민위원장에 선임됐다.
짧은 인공(북한군 점령 시절) 생활을 뒤로 하고 전라남도에서 북한군이 조직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자은면 지방 좌익들은 남진창고 등지에서 경찰 가족, 우익 가족들을 최소 200명에서 최대 600명을 학살했다.
그러니 피난 갔다 돌아온 피해자의 가족들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법이고 이성이고 없었던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가족이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앙갚음했다.
▲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자은지서 터 |
ⓒ 박만순 |
표정애(당시 11세)는 짚신을 신고 조금 전에 끓인 또랑새우(새뱅이의 전라도 방언) 찌개를 담은 보퉁이를 들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컴컴했지만 그나마 새벽별이 친구처럼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 안심이었다.
남진창고 가는 길은 멀고 험하기만 했다. 집에서 10리(4km) 길이었는데 주로 산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한 달 가까이 하고 있는 일이지만 한 번에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일이었다.
인공 때 공산당 머리 쓴 마을 사람들이 숱하게 남진창고에 갇혔다. 남진창고는 자은지서 근처에 있는 창고로, 수확한 벼나 면화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이런 창고가 한국전쟁기에는 원수(?)를 죽이기 위한 임시 구금시설로 이용됐다.
전쟁이 나자마자 자은면 보도연맹원들이 이 창고에 예비검속돼 목포형무소로 이송됐고, 인공시절 완장 찬 이들이 우익인사 및 가족들을 가뒀고, 이번에는 인공시절 부역했던 이들을 죽이기 직전에 가두는 곳이 돼 버렸다.
기진맥진한 표정애가 남진창고에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때였다. '어, 이상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창고를 지키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을 멘 청년이 있어, 늘 밥을 싸갖고 오는 이들을 통제했는데, 그날따라 창고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눅이 든 표정애가 한참을 창고 앞에 서 있다가,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한참을 두드리자 창고 옆에 있는 지서에서 순경이 나왔다.
"야! 거기에 아무도 없어"
"어디 갔는데요?"
"..."
표정애의 물음에 경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소녀 표정애는 어제저녁에 오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정애야. 나, 내일 목포 간다." '오빠가 목포에 갔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 할 때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나타났다. 창고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들이 경찰이 표정애에게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곡을 터뜨렸다.
자신들의 남편, 아버지, 자식들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 오빠 표인철의 밥을 약 한 달간 나른 표정애의 진술서 |
ⓒ 박만순 |
빨갱이 가족으로 빨갱이를 잡는다
"오늘부터 비살봉에서 빨갱이를 찾아라!" 수비대가 청년 표인철(1932년생)에게 준 임무였다. 표인철은 그날부터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갖고 비살봉에 올랐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며칠간 빨갱이 잡기에 실패한 표인철은 수비대에 의해 남진창고에 구금됐다.
그렇다면 목포에서 갓 돌아온 표인철은 왜 비살봉을 뒤지는 일을 맡았을까? 무안군 자은면 와우리 출신 표인철은 어릴 적 목포행 배를 탔다. 넷째 작은아버지 표재화(1931년생)가 목포상고를 나와 교원양성소를 다니는 등 목포에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작은아버지 표재화는 한 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자신의 롤모델이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언변이면 언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롤모델을 찾아 일찌감치 목포로 갔지만 자신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정작 정식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낮에는 같은 마을 출신인 배성노가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일을 하고 야간에는 중학교에 다녔다. 이른바 주경야독을 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6.25가 났고 보도연맹원이었던 표재화는 본가가 있는 자은면으로 갔다가 예비검속돼 비금도에서 수장됐다.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표인철은 군경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 자은면 와우리 집으로 왔다가 마을 수비대에게 '빨갱이를 잡아라'라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빨갱이 가족으로 빨갱이를 잡는다'는 격이었다. 표인철이 좌익활동을 한 것은 전혀 없지만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표재화와 인공시절 여성동맹 활동을 한 표재화의 아내 이금자의 조카라는 것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쓰게 된 이유였다.
결국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한 표인철은 한 달 가까이 남진창고에 구금됐다가 1950년 11월 초 남진창고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그의 넷째 숙모 이금자와 당숙 표윤진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남진창고에 갇힌 이들은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군경이 수복한 1950년 10월 18일경부터 그해 11월 초까지 한 달 가까이에 걸쳐 10명 단위로 배에 실려 수장됐다.
앞서 말한 인공시절 자은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박아무개도 마찬가지였다. 코가 꿰뚫린 상태에서 자은면을 한 바퀴 돈 그는 피를 너무 흘려 목숨을 오래 보전하지 못했다. 남진창고에 구금된 지 얼마 안 돼 반죽음 상태에서 가슴에 커다란 돌을 매단 채 바다에 수장됐다.
설령 인공시절 인민위원장을 한 박아무개가 군경 수복 직전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에 정치적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은 엄밀히 불법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와 같이 죽음을 당한 며느리(박종남의 아내)와 손주(박종남의 자식) 3~4명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중신학의 대부, 서남동
민중신학의 대부 서남동(1918~1984)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직신학자로, <민중신학의 탐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었던 청년들의 필독서였던 <민중신학의 탐구>는 1980년대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 서남동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 그의 가족이 완장 찬 이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천서씨 집성촌인 전남 무안군 자은면 유천리에는 6.25 당시 서남동 일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인공시절 완장 찬 이들에는 같은 서씨가 많았다. 6.25 직전 빈농이거나 소농이었던 이들과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씨 청년들은 6.25가 나자 토지개혁을 외치며 소위 반동을 숙청했다.
하지만 반동이라는 것이 같은 마을에서 경찰 출신도 없을뿐더러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종교인도 아니었다. 그저 빈농·소농 대 부농이라는 경제적 갈등이 전부였다. 어쨌든 유천리에서 먹고 살 만한 부류에 속했던 서씨들은 완장 찬 같은 집안 청년들에 의해 남진창고에 구금됐다. 목포나 다른 곳으로 유학하거나 피난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일가가 전부 그 대상이었다.
"종자를 없앤다"라는 명목으로 어린이와 아기도 그 대상이었다. 소위 후환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씨를 말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남동의 작은아버지 두 명과 형 두 명(남석, 남옥)이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유천리 이천서씨 여섯 집안에서 25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군경이 수복하면서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피난 갔다 온 죽임을 당한 자의 가족 눈에 뵈는 것은 없었다. 불과 3개월 전까지는 아저씨, 형님 하던 사이가 '원수'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상대방의 서씨 집안을 씨도 말리지 않고 남진창고에 구금시켰다. 당한 것보다 약간 많은 30명을 남진창고에 가두었다가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군경수복 후 자은도(면)에서 소위 부역한 이들을 학살하는데 주된 책임은 누구일까? 실제로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학살 현장에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죽창질을 한 이들은 대부분 같은 마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남진창고에 갇힌 이들을 수장시킨 것과 마을별로 수비대가 조직돼 불법적인 학살을 저지르는 일에 수수방관하거나 배후조종(?)한 데 경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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