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든 유령처럼 출몰한다”

손영옥 2024. 6. 5.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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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선재센터서 첫 개인전 갖는 호추니엔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갖는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이 지난 2일 ‘타임피스’ 작품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한형 기자


극장처럼 캄캄하다. 그럼에도 벽면에는 전시장임을 환기하기라도 하듯 사각 프레임에 흐르는 영상이 작품처럼 걸려 있다. 일본 만화의 한 컷 같은 장면, 호랑이가 제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는 장면,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장면, 회중시계, 해골과 모래시계가 있는 정물화….

‘시간의 조각들’(타임피스)라고 명명된 이들 42개의 영상은 시간과 관련된 이미지를 담았지만, 상영 시간은 제각각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각기 다른 시간의 감각을 파편처럼 경험하게 한다. 이 설치 영상의 반대편에는 진짜 극장처럼 대형 스크린에서 애니메이션이 나온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시계탑 수리공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현대미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 유명한 ‘치즈처럼 녹아내리는 시계’ 이미지까지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와 이미지의 파편들이 종횡무진 이어진다. ‘시간의 T’ 라고 제목이 붙은 이 애니메이션 영상 뒤에는 실사영상 스크린이 하나 더 숨어 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를 2D 형식으로 설치한 메인 신작인 ‘시간의 T’. 아트선재센터 제공


싱가포르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작가인 호추니엔(48)의 한국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시간과 클라우드’라는 제목으로 4일 개막했다. 전시 준비를 위해 방한한 작가를 개막에 앞서 2일 현장에서 만났다.

전시장은 왕왕거리는 사운드까지 겹쳐 스펙터클하면서도 몰입감이 있다. 애니메이션이 주요 표현 매체라 친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영상은 시간 순서대로 스토리 라인을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난해하다. 게다가 알고리즘에 의해 장면들이 선별되기 때문에 볼 때마다 장면 순서가 다르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호텔 아포리아’의 스틸 컷들. 호추니엔은 이처럼 등장 인물의 얼굴을 지움으로써 해결되지 않는 역사는 현재화돼 유령처럼 출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시간은 다층적이다. 각기 다른 종류의 시간이 가능하다. 같은 시간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 알고리즘을 통해 매번 다르게 편집되도록 했다”는 작가는 “저 영상 작품(시간의 T)이 소설이라면 벽면에 펼쳐놓은 42개 영상(타임피스)이 목차 같은 구실을 해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목차’를 먼저 보는 게 낫다는 얘기다.

호추니엔은 지난 2년 동안 시간에 대한 개념을 연구해 이 신작을 만들었다. 그는 서구의 근대가 만든 시간 개념에 반기를 든다.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는 동서양 모두에 존재했지만, 이 시간을 균질하게 전 지구적으로 적용한 것은 근대 유럽인이 처음이었다. 이는 지구라는 공간을 시간적으로 관리 통제하는 식민지 제국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시간을 1차원의 공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삶으로부터 죽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시시각각 바뀌는 영상에 빠져들면서도 철학적 발언을 하는 듯한 자막을 보며 시간이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난해해서, 그러면서도 매력적이어서 여러 번 봐야 하는 ‘N차 관람’이 불가피해 보이는 전시다.

일제 식민지를 겪은 한국의 관람객들에게는 2층의 영상 설치 작품 ‘호텔 아포리아’가 더 와 닿을 수 있겠다. 싱가포르 역시 근대기에 영국과 일본의 이중 식민지 경험을 했다. 호텔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로 간 어느 부대의 마지막 공식 연회가 있었던 교토의 료칸(여관)에서 땄다. 2019년 일본의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초청받았을 때 이 료칸에 설치할 영상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한 것이다. 이번 서울 버전에서 검은 입방체 형태의 6개 상영 공간을 일본의 다다미 형태로 제작한 건 그래서다. ‘파도’ ‘바람’ ‘보이드’ '어린이‘라는 소제목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다다미방마다 욱일기, 전투기, 자식들이 마지막을 보낸 료칸을 찾은 부모 등의 이미지들이 흘러간다. 신풍(神風)을 뜻하는 가미카제가 언제든 재가동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라도 하듯 전시공간마다 소리가 바람처럼 웅웅거린다. 그런데 영상 속에 등장인물의 얼굴이 모두 지워져 있다. 호추니엔은 “그들을 익명화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동시에 현재화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라며 “당시의 폭력이 지금도 되풀이될 수 있고, 폭력의 가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호추니엔은 아시아 근대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역사와 신화,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작품을 해왔다. 말레이계 화교 집안 출신인 호추니엔은 “싱가포르가 식민지를 거쳤음에도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없는데, 그러한 반감의 부재가 오히려 동아시아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작품 세계에 영향을 준 철학자로 프랑스의 들뢰즈, 일본의 교토학파 등이 언급됐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작가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책을 읽고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는 독서광인 그에게 독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영웅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다. 그에게 왜 ‘비판적 시각 연구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는 전시를 보면 안다.

한국의 청년작가에게 조언을 부탁했더니 “조언을 할 자격이 되나 모르겠다”면서도 “과거에 대한 내 관심은 미래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 혹은 역사는 언제든 유령의 형태로 우리에게 출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호텔 아포리아’의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해결되지 않은 난제라는 뜻이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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