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나에게 연락할 것
내 안의 수다쟁이가 말을 걸어왔다
KTX가 막 개통되던 시기에 기차의 맞수는 휴대전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직접 기차를 타야 가능한 ‘진짜 만남’을 전화 한 통의 연락으로 쉽게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 한 통’은 이제 쉬운 연락이 아니라 정성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성의 있는 연결이다. 전화보다 빠른 문자, 텍스트보다 편한 이모티콘 덕에 우린 너무 쉽게 연결 중이다. 소통 도구는 분명 전보다 더 풍부해졌는데 소통의 밀도는 낮아졌다. 쉬운 연결이 쉬운 연락을 이끌지만 무언가가 쉬워지면 꼭 더 어려워지는 것들이 생긴다.
분명 내게 연락을 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계정’들이다. 5% 할인을 받아보려 친구 추가를 한 브랜드 계정이 휴가철을 위한 여름 바캉스룩을 알려주겠다며 수시로 연락한다. 소통 없는 연락들이 사적 메시지함의 지분을 차곡차곡 늘려가지만 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다.
카톡 대화창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나오는 아득한 얼굴들, 이메일 속 스팸 메일 뭉치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반가운 이름들은 용건 없이 연락하기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사실 가장 연락이 어려워진 상대는 나다. 가장 오래 연락을 미룬 상대 역시 나다. 무수한 메시지가 나에게 닿으려고 알림을 울리는 중에, 나와의 연락은 깜빡 놓치고 있었다. 각종 알람 속에서 나 자신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듣는 법을 몰랐다. 매 순간을 함께하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법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우선 내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보라는 명상적 조언을 따르다 보면 바짝 날 선 그날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내가 진짜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상대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귀 기울이지 못한 탓에 시간의 퇴적에 파묻혀 버린 과거의 나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이쯤이면 잘 지내는 것이리라 지레짐작하며 진지한 연락을 유예했던 과거의 ‘나’들이다.
아무리 숨소리에 귀 기울여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날 한 번쯤은 누군가 나에게 연락을 해주길 바라는 방식과 온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자연스레 용건 없는 안부를 주고받듯 나와 더 잘 지내기 위해 내게 연락하고 싶어졌다.
가까운 친구에게 말을 걸듯 요즘 밥은 잘 먹는지, 아름다운 하늘을 충분히 누렸는지 물어보았다. 이미 어렴풋이 눈치챈 고민에 대해 ‘꼭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모두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안부와 위로로는 나에게 닿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과 나와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연락은 밖으로 티 낼 수 없었던 무음의 소란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나만 아는 별난 마음의 꼴을 묵묵히 들여다보니 내 안의 수다쟁이가 말을 걸었다. 늘 성장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자신을 다그쳤고, 친절해지고 싶은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심해 자책했고, 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타일렀지만 아무것도 잘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말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내 작은 그릇을 인정하는 건 살짝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견디면 나와 조금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모으면 앞으로 나와 좀 더 자주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큰 용건이 생기기 전에, 나와의 연락이 끊기기 전에 내 안에서 쌓여가는 알림들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잘 들어주고 싶다. 다행히도 나와 연락하기 위해선 KTX가 필요치 않으니 조금 더 자주 나를 만나러 가야겠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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