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의 시선] 산유국? 이유 있는, 미지근한 반응

김창규 2024. 6. 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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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 경제에디터

‘연초(年初)를 흥분시킨 낭보(朗報) “석유(石油)가 나왔다” 朴대통령 연두회견(年頭會見)이 던진 충격파.’

반세기 전인 1976년 1월 15일자 한 일간지 1면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기술진이 3개 공을 시추한 결과 그중 한 군데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됐습니다. (중략) 경제성이 있을 만큼 매장량이 있을지는 더 조사해봐야 합니다. 4~5개월이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유 시추” 50년 전과 겹쳐 보여
박정희 대통령 ‘석유 발견’ 해프닝
정파적 예단 말고 경제성 따져야

‘기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하니까 당시 언론이 흥분해 대서특필했고 국민은 환호했다. 사정은 이랬다. 1975년 5월 31일부터 정부 주도로 비밀리에 경상북도 포항에서 세 곳의 시추가 시작됐다. 첫 번째 시추공은 1150m 파고 들어가니 단단한 화강암이 가로막았다. 석유는 퇴적암층에서 발견된다. 두 번째 시추공도 1400m쯤 파보니 역시 화강암이 나타났다.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그런데 75년 12월 3일 두 번째 시추공의 1475m 화강암층에서 시추봉이 푹 꺼지듯 들어가더니 갑자기 시커먼 액체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샘플은 청와대로 전달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연두회견에서 전격 발표했다. 문제는 샘플 성분이었다. 샘플을 분석해 보니 비정상적으로 경유 함량이 높았다. 보통 원유에서는 휘발유·등유·경유·중유 등의 성분이 나온다. 샘플에서 경유 함량이 많은 건 시추할 때 윤활제로 경유를 주입했고 이 경유가 바위틈을 타고 빈 곳에 모여든 것으로 보였다. 그 후론 시추공에서 더 이상의 석유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첫 국정브리핑을 열고 동해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을 발표했다.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중략) 저는 오늘 산업통상자원부에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에 대한 탐사시추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사전준비작업을 거쳐 금년 말에 첫 번째 시추공 작업에 들어가면 내년 상반기까지는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차분하게 시추 결과를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회견, 포항 영일만, 석유, 추가 조사 등…. 이번 윤 대통령의 브리핑에 반세기 전의 박 대통령 회견이 겹쳐 보이는 건 비슷한 점이 많아서다. 여론의 반응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박 대통령 회견 때는 열광적이었다. 주요 신문 기사에는 시민이 TV로 회견을 보며 두 손 들고 환호하는 사진이 담겨 있다. 길거리에선 시민이 얼싸안고 만세를 외쳤다는 내용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한민국은 변방의 가난한 나라였다. 73년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로 석유 값은 1년 새 4배 이상 뛰었고 주요 선진국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던 때였다. 가난과 고물가로 고통받던 한국인에게 ‘산유국의 꿈’은 한 줄기 빛이었다. 결국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컸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발표엔 반응이 미지근하다. 온라인에선 “석유야 쏟아져라” “산유국 되는 건가”라는 기대 섞인 반응도 있지만 “김칫국 마시지 마라” “반세기 만에 박정희 정치쇼를 다시 보게 됐다” 등의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이미 한국은 고도성장을 통해 세계 경제 13위권의 국가로 올라섰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머지않아 4만 달러를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가전 등 분야에선 한국산이 시장을 이끌고 있다. 그때와 경제 상황 자체가 많이 다르다. ‘산유국의 꿈’은 반세기 전만큼 절실하지 않다.

정치적 상황은 닮은 꼴이다. 76년은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민심이 싸늘해졌고 지지율도 급락했다. 국면 전환을 위해 ‘석유 발견’이라는 설익은 발표를 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지금 윤 대통령도 설문조사에서 ‘잘하고 있다’는 긍정 평가가 21%로 취임 이후 가장 낮다. ‘잘못하고 있다’는 부정 평가는 무려 70%에 달한다(갤럽, 5월 31일 발표). 정권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발표를 두고 막연한 기대감을 가질 것도, 앞뒤 안 가리고 비판할 이유도 없다. 정파적으로 볼 필요는 더더욱 없다. 포항 앞바다에 가스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은 포항 사람이라면 다 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5000억원이라는 세금을 들여 시추하기로 했다면 결과에 책임 질 각오도 했을 터다. 국민 입장에선 경제성이라는 잣대로 냉정하게 판단하면 된다. 50년 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건 대통령이 말을 쉽게 주워 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점이다.

김창규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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