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흥호의 글로벌 포커스] 라이칭더의 대만, 레드라인 넘지 않는 ‘평화적 현상 유지’ 예상

2024. 6. 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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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칭더 대만 새 총통이 지난 5월 20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오른손을 흔들며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문흥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명예교수

라이칭더(賴清德) 신임 대만 총통이 지난 5월 20일 취임사에서 밝힌 국정 지표는 민주·평화·번영이다. 대만의 어두운 과거와 미·중 패권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중국의 대만’이 아닌 ‘세계의 대만’으로 도약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대만 문제를 최대한 국제화하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희망처럼 대만의 미래가 환하게 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안팎으로 당장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애물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라이칭더 정부의 정책 추진 강도와 양안(兩岸)을 저울질하는 미국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양안 관계와 동북아 정세가 크게 출렁일 소지가 다분하다. 특히 대만의 안보 상황과 연동된 한반도는 대만해협의 거친 파고를 피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 민주·평화·번영 국정지표 제시
‘민주주의 첨병’ 세계에 각인
통일과 독립 중간 노선 선택
민주진영 반도체 공급망 밀착

중, 대만 총통 취임식 인터넷 접속 차단

우선 라이 총통의 취임사는 중국의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대만의 민주주의를 세계에 각인시키고, 대만이 민주주의 수호의 첨병임을 호소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그는 중국이 대만의 민선 지도자와 리더십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역설했다. 이는 중국의 많은 이들이 내심 대만의 민주주의와 최고 지도자 선출 과정을 부러워한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실제 총통 선거 과정에서 대만인들의 참여 열기와 축제 분위기가 넘쳐났다. 중국 정부는 대만 주권자에 의한 자유로운 정권 교체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을 매우 부담스러워 한다. 총통이 아닌 일개 지방정부(臺灣省)의 지도자 선출일 뿐이라고 폄훼하면서도 정작 라이 총통의 취임식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이처럼 라이 총통의 민주주의 열창에는 중국과 세계를 향한 고도의 전략이 담겨 있다.

평화를 강조한 것은 군사안보에 국한되지 않는 복합전략적 차원이다. 대만해협의 평화는 통일·독립의 문제와 직결된다. 중국이 무력 사용 가능성을 유보하는 것은 대만 독립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대만이 노골적으로 독립을 선포하거나 외세가 개입하는 경우 중국의 무력 사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 지도자의 필수 결행 사항이다.

취임사에 ‘중화민국 대만’ 호칭 사용

20일 대만 총통부에서 라이칭더(왼쪽) 신임 총통이 한궈위(오른쪽) 입법원장에게 중화민국 인장을 건네받고 있다. AFP=연합통신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대만공화국’을 꿈꾸는 민진당 지도자들이다. 라이 총통은 전임자인 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과 유사한 독립주의자지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취임사에 ‘중화민국 대만’ 호칭을 사용하고, 양안이 상호 예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One China)’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중화민국과 대만의 병기는 민진당 지지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결국 라이 총통은 미국의 지원으로 대만을 중무장하는 것보다 통일과 독립의 중간선을 취하는 것이 대만해협의 평화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라이 총통의 말대로 중국의 전방위적 압박에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평화적 현상유지는 대만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다. 중국은 라이 총통이 ‘신(新)양국론’에 근접하는 모호한 표현으로 하나의 중국을 희석하고 독립 의지를 숨긴다고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론 다행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라이 총통이 강조한 번영은 중국과 세계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는 대만 경제의 필수 요소다. 그동안 양안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경제협력은 위축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은 라이 총통을 겁박하면서도 취임 직전 1000명이 넘는 대만 경제계 인사를 대륙에 초청해 양안의 융합 발전을 논의했다. 하나의 모습만 주시하면 양안 관계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다만 라이 총통은 대만의 최대 강점인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을 매개로 민주주의 진영의 공급망에 밀착할 전망이다. 대만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안보를 강화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다. 대만을 ‘인공지능의 섬’으로 만들자는 라이 총통의 주장은 그런 맥락이다.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게”

그렇다면 라이 총통의 새 국정 기조는 한반도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전략적 선택은 무엇인가. 첫째, 라이 총통이 강조한 민주는 국제사회에 중국의 열악한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동시에 ‘민주화의 MVP’ 대만을 지켜달라는 호소다. 한국은 대만과 중국에 대한 지지 또는 비판의 수위를 정교하게 설정해야 한다. 양안 관계를 공산체제와 민주체제로 단순하게 구분하거나 대북 인식의 틀에서 양안을 바라보면 본질을 놓친다.

둘째, 라이 총통은 중국의 ‘레드 라인’을 넘지 않는 것이 대만해협의 평화에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미국의 정치 상황과 방위공약에 대한 대만의 의구심은 여전하다. 라이 총통이 대만의 미래를 전적으로 미국에 맡길 것이라는 판단은 순진하다. 비굴하거나 오만하지 않겠다는 말은 대만 지지층은 물론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고려한 것이다. 양안의 통일·독립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거나 군사적 요인만 강조하는 안보 분석은 오판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셋째, 라이 총통이 경제 도약의 양대 축으로 제시한 양안 경협과 민주주의 진영의 공급망 연계에서 한국은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다. 한·중 경제관계는 위축됐지만 양안 경협은 정치·군사적 공방과 무관하게 유지·확대되고 있다. 중국의 정치적 특혜가 양안 경협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대만을 묶어두려는 중국이나 미우나 고우나 양안 경협이 필요한 대만의 이해관계는 단절되기 어렵다.

반도체와 AI 등에서도 한국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대만은 이를 국가 생존 문제로 인식하지만, 한국은 그 정도의 절박감은 없어 보인다. 미국·일본·유럽연합(EU)과의 협력도 한국보다 대만이 한발 앞선다. 일본은 친일 정서가 강한 대만과의 협력에 전력 질주하고 있다. 일본이 대만에서 노리는 것은 단순히 반도체만은 아니다.

치밀하고 지속가능한 대중 전략 필요

이처럼 라이 총통의 새로운 시도가 한반도에 끼칠 파장은 절대 가볍지 않다. 현상유지에 방점을 뒀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중국이 아닌 ‘대만의 자손’이라는 대만인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욱이 대만 문제는 고도로 국제화되고 민감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이 대만 문제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것도 문제지만, 중국의 정교한 대만 전략에 좌표 없이 끌려다녀서도 안 된다. 대만 문제는 미·중 패권경쟁이 지속하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난제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일·중 정상회의에서도 주요 안보 현안은 자국의 입장을 표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중국은 미국이 대만 문제를 크게 양보하지 않는 한 북한 단속에 발 벗고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반도가 이미 대만 문제의 유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이런 최악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더욱 치밀하고 지속 가능한 대중 전략이 절실하다. 모처럼 한·중이 합의한 고위급 외교·안보 대화는 한국의 전략을 재정비할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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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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