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잃은 화가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캔버스 위 점, 그리고 물방울

권근영 2024. 6. 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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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5일부터 '김기린: 무언의 영역'

" “창에서 출발했어요. 창호지는 나의 먼 그리움이에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이 담긴 시간, 잊을 수 없는 고원의 겨울….”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 인터뷰) " 인터뷰 영상 속 노화가는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먼 눈을 했다.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난 김기린(1936~2021)은 14세에 월남했다가 전쟁이 나면서 영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보다 네 살 많은 설치미술가 이승택(92)은 같은 고향 출신 김기린에 대해 “집에 철학책이 많아 자주 빌려봤다. 개념을 물으면 설명해 줄 정도였다”고 돌아봤다.

"고향집 창호지가 그림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던 김기린의 1980년대 '안과 밖' 연작이 걸린 전시장. 사진 갤러리현대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그림으로 쓴 시’


외국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생텍쥐페리를 공부하러 1961년 프랑스로 갔다. 발레리ㆍ랭보ㆍ말라르메 같은 시인이 되고 싶어 노트에 프랑스어 단어를 적으며 공부했지만 20대 중반의 문학청년에겐 버거웠다. 미술사를 청강했고, 그림을 배웠다. 시를 발표하던 김정환은 그림 그리는 김기린이 됐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교 동창이 "너는 목이 짧으니 기린이라고 하라"며 반어적으로 붙여줬던 별명이었다.
김기린, 무제, 1967, 캔버스에 유채, 195x130㎝. 사진 갤러리현대


1967년 흰색ㆍ노랑ㆍ녹색ㆍ남색의 색기둥을 그린 추상화가 주목받았고, 1970년 검은 바탕에 검은 직사각형을 그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내놓았다. 오늘날 ‘단색화’라고 부르는 그림이다. 캔버스 위 검은 직사각형은 때로는 원고지나 문 창살 같은 격자무늬가 됐다. 1977년부터 그는 2m 넘는 대형 캔버스를 여러 겹 검게 칠한 뒤 십자형으로 4등분 하고 각 네모 안에 수없이 검은 점을 찍었다. ‘안과 밖’ 시리즈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30겹씩 찍고 또 찍어서 완성에 2년가량 걸렸다는 이 그림은 멀리서 보면 그저 검거나 붉은 평면이지만 다가가면 올록볼록 물감층이 도드라지며 리듬을 형성한다.

" "사각형 패턴을 해서 찍는데도 찍는 순간마다 점이 다 달라요. 그게 나는 내 그림의 생명력이라 생각해요. 점을 찍는 순간만큼은 나를 넘어 뛰어요. 계속해서 그림 그릴 수 있으면 나는 제일 충만된 시간을 사는 거야." "
그가 찍은 점은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그림으로 쓴 시였고, 고향 집 아침 햇살이나 달빛을 투과하던 문 창호지였다. 그림 그릴 때 내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던 “멘델스존에서는 노란색을 보고, 차이콥스키에서는 회색, 베토벤을 들을 때는 녹색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던 그 ‘느낌’을 원색의 단색화로 남겼다.

"멘델스존에서는 노란색을 보고, 베토벤을 들을 때는 녹색이 떠오른다"던 김기린의 '안과 밖' 시리즈. 권근영 기자


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작고 후 첫 회고전

유학 10년 만에 파리 국립 고등 장식미술 학교를 졸업한 그는 복원가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자기만의 단색화를 그렸다. 조카 민순기(61) 씨는 “고모부가 파리 집 지하에서 종이를 물에 불리며 복원 작업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꽤 시간과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미술관 등에서 툴루즈-로트레크 같은 중요한 화가들의 작품 복원을 의뢰한다고 들었다”고 돌아봤다.

한지에 점을 찍어나간 1990년대의 '안과 밖' 연작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사진 갤러리현대


“내 자신이 반듯하게 서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나 내가 뭐 대단한 것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말했던 ‘그림의 시인’, 김기린은 2021년 파리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5일부터 김기린의 작고 후 첫 개인전 ‘무언의 영역’이 열린다. 검은 바탕에 검은 사각형을 그린 1970년대의 초기 단색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부터 작고할 때까지 이어간 전면 점화 ‘안과 밖’ 연작 등 40여 점이 걸렸다.

가까이서 보면 얇게 펴바른 캔버스 바탕 위에 반복해 찍은 점들이 도드라진다. 권근영 기자


특히 종이에 유화로 점을 찍어나간 1990년대의 ‘안과 밖’ 연작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영국 출신 화가이자 『모노크롬』의 저자인 사이먼 몰리는 “첫눈엔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이면엔 ‘비밀 코드’가 담긴 듯한 김기린의 그림은 ‘가까이 다가와서 보라’며 관객들을 적극 초대한다“며 ”스마트폰에는 담기지 않는 그림의 본질을 전시장에 와서 직접 보시라“고 권했다.

파리에 모인 한국의 서양화가들. 왼쪽부터 신성희ㆍ김창열ㆍ윤형근ㆍ김기린. 지금은 모두 세상에 없다. 중앙포토


바로 옆 갤러리현대 신관에서는 이번 주까지 ‘물방울 화가’ 김창열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김기린보다 7년 먼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1929~2021)은 그보다 7개월 앞서 세상을 떴다. 고향 잃은 두 사람은 파리에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화폭에 그리고 또 그렸다. 어떤 이에게는 그게 물방울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점, 점, 점이었다.

김창열, 물방울, 2012, 캔버스에 유채, 162x112㎝. 사진 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 5일부터 7월 14일까지. 갤러리현대 본관. 무료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9일까지. 갤러리현대 신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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