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태극기 40장이 국회 의원회관으로 간 까닭
[최진섭 기자]
설치미술을 하는 한희선(53)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연말 강화에서 열린 한강하구평화센터의 모임에서다. 이 자리에서 한 작가의 설치미술전 작품집 <무뎌진 기억>(2022. 12)을 받아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작품집에 10여 장의 태극기가 들어간 사진이 실려 있는데, 당시 내가 '태극기'를 주제로 한 단행본 출판 기획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길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태극기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또 열리면 알려달라고 했는데, 지난 3일부터 여의도 의원회관 국회 아트갤러리에서 한희선 작가의 '사이흔적-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설치미술전이 개최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시회 첫날 오후 의원회관 로비에 조성된 문화공간인 전시장을 찾았다. 태극기와 강화 소창 천을 소재로 한 전시 작품을 둘러본 뒤 한희선 작가에게 이번 전시회의 이모저모에 관해 물어보았다. 전시 첫날이지만 특별한 개막 행사가 없어서 여유롭게 인터뷰할 수 있었다.
▲ 여의도 의원회관 국회 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한희선 작가의 ‘사이흔적-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설치미술전(6. 3 ~ 6. 14). 여기에 전시된 태극기 40장은 한희선 작가가 백령도에서 수집한 헌 태극기이다. |
ⓒ 최진섭 |
전시장에는 40장의 크고 작은 태극기를 모아 만든 작품(가로 6m, 세로 4m)이 설치되어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깃발을 모아서 가로세로 비율을 6 : 4로 맞추었다고 한다. 모두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묻어 있는 낡고 헤진 태극기였다. 작가는 이 태극기를 어디서 구한 것일까?
"모두 백령도에 걸려 있던 태극기에요. 2022년 8월 백령도에서 17일 동안 지내면서 '헌 기 줄게 새 기 다오'라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구했죠. 새 태극기를 헌 깃발과 바꾸는 행사였어요. 포구의 어선, 해경 경비정, 해병대 6여단 부대, 수협, 농협, 개인 집 등 곳곳을 방문해서 전시회의 취지를 일일이 설명하면서 얻었어요. 인천에서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에 걸려있던 태극기도 있는데, 이 깃발의 천이 제일 질겨요. 그런데도 비바람을 헤치고 다녀서 그런가 보통 3개월에 한 번씩 깃발을 갈아 다는데, 마침 교체할 때가 돼서 구할 수 있었죠."
- 백령도에서 구한 태극기로 전시를 몇 차례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인천문화양조장에서 그리고 2023년 6월 인천시청 별관 외벽에서 '무뎌진 기억 : 되새김展'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했어요. "
- 태극기를 소재로 한 설치미술 전시회에 대해 관람객의 반응은 어땠나요.
"전시된 태극기를 바라보며 '태극기 부대인가, 뭐 이런 전시를 하지'라고 비아냥거리는 청년들도 있었고, 순찰을 하던 경찰이 찾아와서 태극기 음양의 방향이 잘못됐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어요. 제가 미술작품이라고 설명을 해도 뭔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더라고요."
-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해진 게 사실이긴 하죠. 태극기 하면 태극기 부대를 떠올린다든지.
"나는 풍자하는 작가도 아니고, 좌우의 이념에 치우치는 거 경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태극기를 소재로 전시할 때마다 뭔가 정치적인 의도를 찾으려는 외부의 시선을 느끼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제가 회사 생활하다 뒤늦게 가구를 배웠고, 늦깎이 작가가 되었어요.
2020년, 석사 학위 청구전 할 때 태극기의 음양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뒤바뀐 그림을 그렸는데 교수님이 말려서 발표 못 한 적도 있어요. 나의 관심사인 음양의 순환, 연기의 철학을 태극기의 문양과 연결시켜 얘기하려고 한 건데, 태극기 자체를 전시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하더라고요. 정치적 해석을 우려하는 거죠. 때가 묻고 지저분하고 훼손된 이미지의 헌 태극기라 더 그랬던 것 같고요."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의 태극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네 모서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효(爻 : 음 --, 양 ―)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한다. 이들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태극기는 이처럼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이러한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이룩하고,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세계 어느 나라 국기에도 이처럼 심오한 우주 만물의 철학이 담겨 있지는 않을 것 같다.
▲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로비(국회 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한희선 작가의 ‘사이흔적-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설치미술전. 정오쯤 로비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마치도 전시장에 의도적으로 설치한 조명처럼 작품과 조화를 이루었다. |
ⓒ 한희선 |
- 전시회 제목 '사이흔적 –이것으로 말미암아(연기)'가 쉬운 듯 어렵기도 하네요. 이 말이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요?
"사이흔적은 제가 만든 말이죠. 사이공간이란 건축용어가 있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의 중립적인 공간을 의미해요. 안도 밖도 아닌, 한옥의 툇마루도 그런 공간이라 할 수 있죠. 사이흔적은 사이공간에서 만나 그들 존재가 남긴 흔적이라고 보고요. 제 석사 논문 제목이 <존재의 '사이흔적' 표현 연구>(2021. 2)인데, 논문에선 흔적을 인비튄트레이스(in between trace)로 번역했어요. 사이흔적은 내가 지향하는 작업의 철학이 담긴 말인데, 이는 제 작업의 과정이고 결과물이기도 하죠. 산화되고, 죽어서 흔적을 남기지만 그게 끝이 아니고 반드시 환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산화작용과 순환을 의미합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래요."
- '사이흔적' 개념과 태극기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죠?
"이번 전시회에 사용한 태극기도 모두 오래된 흔적의 산물이잖아요. 그리고 음양 사상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태극기 자체가 제가 추구하는 '사이흔적'의 철학이 담겼어요."
산화, 환원, 순환, 연기, 흔적에 주목하는 한희선 작가의 작품 소재는 주로 오래된 물품, 헌 거, 흔적의 산물이다. 2023년 5월엔 헌책을 사용해서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전시(설치미술전 사이흔적-간섭)를 하기도 했다.
▲ 2022년 여름 백령도 하늬해변에 설치된 군사시설물인 용치에 강화 소창 천으로 감싸주는 설치미술전(무뎌진 기억; 새김 展)을 했던 한희선 작가와 해변에서 어업을 하는 백령도 주민들. 한 작가는 뒤엉킴 속에 질서와 조화, 일상의 평화가 담긴 이 사진이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
ⓒ 한희선 |
기사에 넣을 작가 사진을 한 장 골라 달라고 했을 때 한희선 작가는 2022년 여름 백령도 하늬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해안가에 설치한 용치에 감았던 강화 소창 천을 거둬서 들고나오는 장면이었다. 용치는 1970~80년대에 적의 수륙양용정 같은 함정이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건데 지금은 녹슨 채 방치된 군사시설물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는 좌우에 해산물, 다시마 채취하는 여성과 잠수복 입은 남성이 있고, 급히 용치를 감았던 소창을 거둬서 나오던 내가 찍혔어요. 바닷물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하느라 사진이 찍히는지도 몰랐죠. 나중에 이 사진 보고 감동받았어요. 그동안 내가 추구한 작품세계가 잘 담겨 있는 사진이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내는 풍경, 뒤엉킴 속에 질서와 조화, 일상의 평화가 담긴 사진이에요."
- 일상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백령도 태극기에 접근했어요. 처음엔 호기심을 안고 시작했는데, 백령도에서 40개의 태극기를 구하며 느낀 건 그들에겐 일상적인 물건이라는 거였죠. 국경일이나 기념일 같은 때 사용하는 특별한 물품이 아닌 거예요. 접경 지역 바다에서 주민들을 지켜주는 부적, 안전을 보장하는 상징 같은 것이기도 해요.
주민에게 받은 태극기 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은 장천 포구에 정박한 어선에 걸렸던 태극기예요. 비바람에 다 헤지고 3분의 1만 남은 낡은 태극기를 보면서 일상적인 태극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백령도에선 관공서가 아니더라도 태극기를 365일 걸어놓는 것이라 일상적이고, 그래서 찢어지고 헤져도 그냥 익숙한 깃발인 것이죠."
평화는 존중에서 오는 자유
- 백령도 해변의 용치에 흰 천을 거는 설치미술을 기획한 의도는 무엇이었나요?
"녹은 산화와 희생의 산물이 아닌가 싶어요. 2018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했죠. 아버지가 땅속에 묻히고 흙이 덮이는 기억이 두고두고 떠올랐는데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어떤 존재로든 다시 태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모든 존재는 죽고, 산화하지만,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환원하고 환생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 뒤로 녹에 관해 관심이 생겼고, 제 작업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죠. 인간의 죽음 역시 끝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백령도 해변 진흙 뻘밭에 설치된 수백 개의 용치(용의 이빨을 닮았다 하여 생긴 말)를 보는 순간 작가는 아버지가 떠올랐고, 또 퇴역한 군인이 생각났다고 한다. 용치의 녹에서 그들이 흘린 피와 땀, 고통과 희생이 연상됐다.
그래서 용치를 강화의 하얀 소창으로 감싸주는 설치미술을 구상했고 분단으로 인해 생긴 그 희생과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한 작가는 2021년 여름 강화 석모도 어류정항 포구에서 녹슨 닻을 소창으로 휘감는 설치미술전(사이흔적-멈추어 바라보다)을 한 적도 있다.
"녹슨 용치를 흰색 소창 천이 감싸는 건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가 있어요. 용치가 아버지라면 소창 천은 어머니를 의미해요. 소창 천은 한국인에겐 매우 친숙한 천이었죠. 실제로 내가 결혼할 때 함을 묶었던 천, 기저귀 감으로 쓰던 천도 소창 천이었고요. 연약해 보이지만 무엇이든 부드럽게 감쌀 수 있는 소창 천은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으며, 용치의 녹과 그것이 상징하는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최전방의 바닷가에 설치된 군사시설물 용치에서 퇴역한 군인을 떠올리고, 해변 개흙에 서 있는 용치의 녹이 그들의 상처이고, 피눈물의 흔적으로 느껴졌다는 한희선 작가. 분단의 상징물이기도 한 용치의 고통과 상처를 하얀 강화 소창으로 감아서 보듬어주는 설치미술전(무뎌진 기억; 새김展)을 했던 그에게 평화는 무엇일까. 탈북자가 날리는 전단과 북에서 보낸 오물 풍선이 남북의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시국에 평화는 사치스러운 단어로 느껴지기도 한다.
▲ 한희선 작가의 ‘사이흔적-이것으로 말미암아(緣起)’ 설치미술전에 전시된 작품의 주 소재는 백령도의 태극기와 백령도 해변의 군사시설물 용치를 감았던 강화도의 소창 천이다. |
ⓒ 한희선 |
한희선 작가는 정치하는 분들이 오다가다 이 전시를 보면서 "태극기의 참 정신인 조화와 균형의 원리, 하나 됨의 이치를 가슴에 담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것이 이곳 의원회관 아트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광화문의 태극기와 백령도의 태극기 그리고 여의도의 태극기는 어떤 의미일까.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필자는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서 휘날리는 수천, 수만 장의 태극기를 보며 '이 시대 태극기의 정체'에 대한 책을 기획해보고 싶었다. 대립과 분열을 넘어 평화을 통일로 가는 길, 파랑과 빨강이 공존하면서 순환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안고 철학자, 소설가, 현장 기자 등 여러 명의 전문가를 만나서 의견도 들어봤으나 수년째 아직 그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음양의 조화가 깃든 태극기에서 남북의 평화를 찾는 한희선 작가의 작품 속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조화로운 뒤엉킴' 속에서 평화를 발견했다는 한 작가는 백령도에서 수집한 낡은 태극기를 여의도 의원회관에 전시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음양 조화의 상징인 태극기의 참 의미가 분열과 갈등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도 적절한 철학임을 전하고 싶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태극기의 부정적 기억은 무뎌지고, 이를 통하여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뿐 아니라 정치적, 구조적 폭력까지 없는 적극적 평화가 확대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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