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불명 연인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여친의 속내
[장혜령 기자]
▲ 영화 <원더랜드> 스틸 |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영화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가 보편화된 근미래, 각자의 사연을 품고 가족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만추>(2011)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김태용 감독의 신작으로 아내 탕웨이와의 두 번째 작품이자 정유미, 최우식, 박보검, 배수지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SF 불모지 한국에서 기술적인 것을 배제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감성을 녹여낸 SF 장르다. 이준익 감독의 드라마 '욘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 영화 < HER >나 <조>의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키워드를 연인, 부모, 자식 등으로 확장한 인간관계에 맞춘다. <가족의 탄생>에서 보여준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의 의미를 인공지능으로 넓히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목적에 맞게 원더랜드를 이용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죽음을 어린 딸에게 숨기기 위해 의뢰한 바이리(탕웨이), 원더랜드 속 인공지능 부모님과 오랜 시간 지내 온 수석 플래너 해리(정유미),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연인 태주(박보검)를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정인(배수지)이 주인공이다.
그밖에 원더랜드에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플래너 현수(최우식)가 여러 의뢰인을 만나며 뜻밖의 과거를 마주하는 성장 서사도 더한다. 원더랜드에는 한쪽 세계가 흔들리면 다른 세계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딸이자 엄마인 바이리가 적응하지 못해 불안해지자 원더랜드 속 인공지능 모니터 성준(공유)까지 위험에 빠져 세계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 영화 <원더랜드> 스틸컷 |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영화는 원더랜드의 환상만을 심어주지 않아 흥미롭다. 부작용과 윤리성을 다루며 질문을 키운다. 오프닝을 통해 원더랜드 서비스와 각각의 인물이 처한 상황을 소개하며 관객의 진입을 유도한다. 원더랜드는 이상하고도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유한한 생명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죽을 사람이 신청하는 서비스다. 자기 성격을 기초로 하되, 원하는 취향을 더해 디자인된다.
사후세계를 두려움이 아닌 무한한 여행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에 성숙함도 비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중간역 림보가 떠오른다.
▲ 영화 <원더랜드> 스틸컷 |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그러나 문제점도 반드시 있다. 현실의 사람을 바탕으로 만들어지지만 더 밝고 건강하고 유쾌한 성격이다. 원하는 성격만 뽑아 만든 가상의 인물은 본체와 괴리감이 생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일에도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소름 끼치는 공포가 될 수 있다.
현실을 반영하는 서로 다른 세상을 뜻하는 거울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와 같다. 바이리가 시장에서 만난 성준과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춤출 때, 현실과 가상의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정인의 내면을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적극 활용하는데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는 연출도 한몫한다.
▲ 영화 <원더랜드> 스틸컷 |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정인과 태주 커플이다. 서로에게 미안한 정서가 깔려 있다. 균열이 생겨 틈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 서비스를 계속 유지해도 되나 의문이 들 정도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기적처럼 깨어난 태주가 뇌 손상으로 예전과 같지 않다는 설정은 정인을 매우 괴롭힌다.
태주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연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원더랜드를 신청했던 게 화근.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만들어 제멋대로 사용한 결과다. 인공지능 태주에게 '노래해 봐'라고 명령하듯 말하는 건 현실과 판타지를 명확히 구분 짓는 정인의 잔인한 정서다.
힘들고 지칠 때 인공지능을 통해 위로받았던 만큼 진짜 태주가 깨어났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은 예정된 오류다. 정인은 인공지능 태주와 이미 유대감을 넘어 정신적 교감을 나눴기에 스스로를 죄책감으로 몰아넣고 괴롭힌다. 아픈 건 태주가 아니라 정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이리를 통해서는 딸과 엄마로서의 이중 정체성과 모성애를 강조한다. 어린 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로서의 입장, 부모보다 먼저 죽음에 이르는 자식의 입장이 교차되는 인물이다. 언제까지 딸을 속이면서 하얀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반면 원더랜드의 설계자 해리는 어릴 적부터 인공지능 부모님과 함께 자라면서 성장한 인물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을 가짜처럼 생각하지 않고 진짜 부모님이라고 믿고 의지한다. 어떤 모습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공지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근미래 모습이다.
▲ 영화 <원더랜드> 스틸컷 |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이 없다면 진정한 기쁨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인사이드 아웃>처럼 슬픔과 슬픔이 공존하기에 기쁨이 극대화되는 게 인생이다. 인간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패를 거듭하며 성장하고 미래를 꿈꾼다. 때문에 자신을 투영했다고는 하지만 원하는 모습만 담긴 인공지능이 섬뜩해지는 지점이다.
원더랜드 시스템은 죽음을 소재로 하는 듯 보이지만 현재의 삶과 미래를 논하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죽은 사람과 함께라면 삶이 즐거워질까. 서비스를 종료하면 그동안의 기억도 함께 사라지는 걸까. 영원한 관계가 있기는 한 걸까. 가족의 관계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등등. 영화를 보고 마구 떠오르는 질문을 수습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개봉까지 걸린 시간이 4년. 오히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다. 지금까지 AI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한국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과거를 되짚어 허들이 낮아진 장점도 있다. 배수지와 박보검의 연인 케미, 탕웨이의 모성 연기, 공유의 특별출연이 얼마만큼 성과로 작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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