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남성 'F1 드라이버' 꿈꾸는 소피아 플로쉬의 도전
[김성호 기자]
모터스포츠, 동력기관으로 구동하는 기체를 타고서 운동능력을 겨루는 스포츠다. 서킷에서 속도를 겨루는 F1, 세계 최고 스톡카 레이싱으로 꼽히는 나스카, 모터사이클 레이싱에선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GP, 르망24로 대표되는 내구성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 WEC, 극단적 환경에서 펼쳐지는 오프로드 경기 다카르 랠리 등 다양한 대회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중에서도 F1은 모터스포츠를 가로지르는 본래적 욕구라고 해도 좋을 속도, 최적의 환경으로 포장된 서킷에서 순수하게 최고 속도를 가리는 대회라고 할 만하다. 오로지 속도를 위해 어마어마한 현금이 투입되며 차체의 성능과 엔지니어링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와 기술개발이 매 순간 이뤄지는 첨단의 스포츠다.
첨단을 향해 달려가는 이 스포츠의 위용은 현존 양산차 가운데 최고 성능을 가진 차량보다 F1 레이싱 차량이 못해도 40여 년의 기술적 격차를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적어도 속도와 관련하여 자동차 기술의 극한에 F1이 있는 것이다.
세계적 자동차회사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기아차조차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요타, BMW, 람보르기니와 같은 굴지의 업체가 F1에 도전했다 바로 물러난 이유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벌어진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 스틸컷 |
ⓒ JIFF |
드라이버는 본능적으로 속도를 좇는 존재다. 수많은 드라이버가 F1 서킷에 서길 꿈꾼다. 그러나 고작 10여 개 팀, 드라이버는 20여 명에 불과하니 경쟁이 박 터질 밖에 없다. 심지어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F1시장에선 드라이버가 뭉칫돈을 싸들고 팀을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울 정도니, 실력 없고 돈 없는, 혹은 돈이 없어 실력을 쌓지 못하는 드라이버들은 그 꿈을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재벌가, 못해도 어마어마한 부호의 자제들이 유독 F1 드라이버 가운데 흔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 업계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소재가 있다. 여성은 드라이버로 부적격한가에 대한 논의다.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공간지각능력과 순발력이 떨어지고, 그리하여 운전능력 또한 떨어질 밖에 없다는 인식은 레이싱 무대에서도 흔히 통용된다.
반면 수천분의 일초 단위 경쟁으로 이뤄지는, 약간의 빠름을 위해 돈은 물론 온갖 탈법과 위법조차 개의치 않는, 여러 스포츠 가운데서도 마초성이 두드러지는 레이싱의 무대에서 도리어 성별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시각에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0.01초라도 빠르다면, 더 큰 돈줄을 물어온다면, 외계인이라도 데려다 쓰겠다는 레이싱팀 감독들 앞에 성차별을 주장하는 게 얼마나 무용한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적잖은 여성 드라이버는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F1 무대는 물론, 하부리그 챔피언십조차 진출한 여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 속 레이싱팀 감독이 듣는다면 또 한 번 복장이 터질 법한 주장이지만, 그 곁에서 레이스를 펼쳤고 또 펼치고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여성주의 작품, 또 페미니즘적 시각이 녹아든 영화가 여럿 초청된 전주국제영화제다. 그중에서도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영화다. 첨단을 밀어 거듭 나아가는 마초적 세계를 무대로, 주목받는 여성 드라이버 소피아 플로쉬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부터가 그러하다. 역시 여성 감독인 소니아 오토의 93분 짜리 다큐멘터리는 소피아 플로쉬가 F1 무대에 서기 위하여 도전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 스틸컷 |
ⓒ JIFF |
소피아 플로쉬, 서킷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 번 들어봤을 수도 있는 이름이다. 실력과 재능으로 따지자면 최고의 선수들에 가려져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두 가지 이유로 제법 이름을 알렸다.
하나는 서킷 레이싱에서 활약하는 드라이버 가운데 여성이 드물고, 그중 F1을 향해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여성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소피아 플로쉬가 그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기엔 민망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후보군을 꽤 넓게 잡는다면 경쟁하고 있는 드라이버라고 표현하는 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 테다.
그녀가 팬들 사이에 알려진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아시아 최대 모터스포츠 대회인 2018년 마카오 그랑프리에서 심각한 사고를 겪은 것이다. 차체가 연석과 다른 차량을 연달아 밟듯이 부딪치며 그야말로 활공비행, 어마어마한 속도로 펜스를 넘어 구조물과 충돌했다. 심각한 사고를 알리는 레드플래그가 바로 펄럭일 정도로 큰 사고. 17살 어린 드라이버 소피아 플로쉬는 척추가 일부 손상되는 중상을 입었다. 시각적으로 단연 그해 가장 치명적인 사고로 꼽혔던 이 사건 뒤 소피아 플로쉬의 이름이 업계며 팬들 사이에 크게 알려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는 이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던 부상을 딛고 재활에 성공한 그녀다. 다시 레이싱을 할 수 있는 몸을 만들고, 106일 만에 운전대를 잡는다.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팀 계약을 따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다 큰 사고를 겪고 복귀한 검증되지 않은 드라이버가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소피아는 독일 중산층 집안의 자제다. 어마어마한 돈을 싸들고 팀을 찾아나서는 일부 선수들과는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겨우 하부리그 팀에서 경쟁할 기회가 주어지고 포디움이라 불리는 시상대에 서는 영광도 안는다. 물론 우승자와 격차도 제법 있고, 팀도 포디움을 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기체를 보유하고 있는지라 소피아의 공헌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팀 내 남자 드라이버에 비하여도 뒤지지 않는, 일부분에선 심지어 앞서기도 하는 경쟁력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F1으로 가는 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 스틸컷 |
ⓒ JIFF |
다음 시즌, 영화는 소피아가 팀과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다른 팀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청하는 드라이버가 있고, 그가 소피아보다 낫지 않음에도 팀은 그를 선택한다. 드라이버가 자기 자산을 털든 스폰서를 물어오든 돈을 구해 팀과 계약하는 것이 이곳의 법칙, 소피아는 아직 돈을 끌어올 역량이 없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여자인 탓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소피아가 이 스포츠에 매력을 느낀 이유를 보여준다. 어린시절부터 레이싱에 흥미를 느낀 소피아다. 다른 무엇보다 레이싱에선 남자 아이들을 앞지르고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고 말한다. 최고나 그 바로 아래 수준, 또 그 바로 아래 수준 또한 아니지만, 적어도 유망주라는 이야기를 듣고 꾸준히 후보군으로 경쟁해올 수 있기까지 이 같은 경쟁심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그러나 소피아는 서킷 밖에선 충분한 후원, 대회당 십수 억에 이르는 돈을 받지 못하고 후원을 줄줄이 따오는 드라이버들에게 밀려나는 일을 겪어야 한다.
소피아의 말이 꼭 맞는 건 아니다. 영화 속 첫 번째 팀의 감독이 하는 말처럼 그건 여자라서 겪는 일이 아닌 것이다. 레이서의 세계에선 수많은 하부리그 남자 레이서들도 같은 일을 겪는다. 특급이라 불리는 재능을 가진 레이서와 부잣집 자제들만이 그런 일을 겪지 않는다. 심지어 비슷한 역량을 가진 유명하지 않은 남성 레이서들의 입장에서 소피아가 가진 유명세는 질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수많은 공식행사에 유명인사로 나다니고 인플루언서로 여러 광고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한 방에 수십억, 수백억 광고계약을 따는 남성을 바라보지만, 그녀와 같은 수준의 레이서 중에서 그녀보다 유명한 이는 거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를 단 한 번도 여자로 대한 적 없다고, 그리하여 어떤 민감한 여성에겐 부적절한 접촉처럼 느껴질 상황까지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감독이고 엔지니어들이다. 그들이 소피아나 영화 제작진의 발언에 어이없어 하는 모습이 내겐 도리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 스틸컷 |
ⓒ JIFF |
남성들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여성 드라이버, 버거운 상황이 수시로 닥쳐오는 건 사실이다. 여성의 생리적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요소가 대표적일 테다.
그러나 영화가 그 자체로 소피아의 여성으로서의 투쟁을 하나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삼고 있음에도, 그녀가 겪는 문제를 여성이기에 겪는 것으로 쉬이 치환하는 태도는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그와 같은 태도는 르망24 대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포뮬러 팀을 구하지 못해 르망24에 출전하게 된 그녀다. 이곳에서 그녀는 실버 드라이버로 다른 실버급 드라이버, 그리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아마추어 드라이버와 함께 3인 팀을 이룬다. 프로 두 명과 아마 한 명이 출전하는 'LM P2' 분과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차를 몰 때 차체에 이상이 생기고, 초반부터 여러 바퀴를 뒤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영화는 24시간 동안 펼쳐지는 르망24에서 소피아의 팀이 이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담는다. 영화 속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소피아는 한국계 드라이버이자 골드 라이센스 소유자 잭 에이켄(한세용), 당시 아마추어던 존 파브와 팀을 이룬다.
초반 크게 뒤지던 경기를 밤새 따라잡아 최종 8바퀴 차이로 마치는 것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소피아는 차체를 고친 후반부 밤샘 대질주로 팀의 역주를 책임졌다며 격려를 받는다. 그러나 이 대회의 부진한 성적으로 팀을 찾는 데는 실패한다. 금녀의 무대에 도전했던 불운한 레이서, 영화는 그렇게 끝맺는다.
반복되는 선택적 조명... 이제는 멈춰야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잘못, 즉 선택적 조명이 <여성 카레이서, 소피아 플로쉬>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된다. 당시 이들의 조는 팀의 세컨조보다 뒤진 25위로 경기를 마쳤다. 최상위 랭커와는 19바퀴 차, LM P2 1위와는 8바퀴 차다. 수많은 바퀴 중 최고 랩 타임도 3분 31초 652로 전체 5위, 최고수준이라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마저도 입상권에서 크게 처져 견제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작성된 기록이다.
무엇보다 아마추어 한 명씩을 포함해야 하는 LM P2에서 후반 격차를 좁힌 건 여러 팀 아마추어 가운데 최고인 존 파브, 이제는 프로가 된 50대 미국인 드라이버였다. 그러나 영화 속 그의 활약은? 놀랍게도 아예 없다. 팀 내 최고 실력자인 한국계 한세용의 활약도 마찬가지.
남초 집단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 물론 있을 테다. 그러나 실력이 가장 중요한 프로스포츠의 현장에서 두드러지지 않는 수준의 많은 드라이버가 소피아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 사이에서 소피아는 이미 유명인사이고, 현저히 많은 광고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피아 스스로는 톱랭커에 비해 기회가 부족하다 말하지만, 팀을 잃은 그녀에겐 영화가 간단히 보이고 넘어가는 것처럼 '여성 드라이버의 감동적 드라마'를 함께 쓰길 원하는 기업들의 호의적인 제안이 주어진다.
소피아가 탄 차엔 언제나 소피아의 이름이 크게 나붙어 있어 찾기 쉽다는 동료 드라이버의 말, 한세용과 같이 훨씬 윗물의 드라이버조차 F1 무대를 사실상 포기하는 상황 같은 건 결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성별이 제 실패며 성공의 원인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짤막한 영화의 클라이맥스조차 소피아의 정확한 기여를 밝히지 않고 선택적으로 편집해 조명하는 감독의 태도는, 소위 여성주의 영화들이 수시로 내보이는 잘못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나는 기꺼이 여성들의 도전을 응원할 준비가 돼 있지만, 이 같은 태도만큼은 배격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여성도 서보지 못한 F1 무대를 향해 전진하는 소피아 플로쉬는 대단한 여성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밖에 도리가 없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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