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수탈 상징 건물에서 열리는 일본 작가의 전시

김현정 2024. 6. 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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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위 치유의 메시지, 8월까지 열리는 레이코 이케무라 개인전 <수평선 위의 빛>

[김현정 기자]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독점하고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 총 9개 지점 중 하나였던 대전지점이 문화재 복원 과정을 거쳐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HEREDIUM,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의 라틴어)으로 재탄생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 위에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유산을 만들어 나가는 헤레디움. 그곳에서 일본계 현대미술작가 레이코 이케무라(Leiko Ikemura)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복원 과정 2019년 9월 19일에 촬영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복원 사진
ⓒ 헤레디움
 
▲ 건물 복원 과정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복원 과정
ⓒ 헤레디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1908년에 설립한 국책회사다. 일본 건축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설계로 1922년에 건립돼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대전체신청, 대전전신전화국을 거쳐 상업 시설로 사용됐던 건물이 2022년에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 완공된 헤레디움 복원 과정을 거쳐 완공된 헤레디움
ⓒ 헤레디움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수탈을 상징하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일본계 작가의 전시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이 둘의 조합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헤레디움과 작가의 철학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터전 위에 새로운 유산을 쌓아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아픔의 역사와 과거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공간 안에서, 작가는 융합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구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작품으로
 
▲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의 계단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에 사용됐던 계단을 그대로 보존한 모습
ⓒ 김현정
 
1층 전시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작품은 인간과 동물, 불교와 기독교를 모두 융합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담긴 3.4미터 높이의 청동 작품 <토끼 관음상(Usagi Kannon)>이다.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얼굴에 토끼 귀가 더해진 이 작품에는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애니미즘 철학이 반영돼 있다.
2011년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방사능이 유출돼 귀가 없는 토끼가 태어났다는 기사를 접한 작가는 애도의 마음과 지구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 Usagi Kannon (340), 2012/24 Painted Bronze (4/5)340 x 160 x 138cm
ⓒ By courtesy of the artist
 
 <토끼 관음상>은 동양과 서양의 융합을 형상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슴 앞에 모은 양손은 성모 마리아의 기도하는 손을, 풍성한 치마는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망토 아래로 세례자 요한을 피난시키듯 감싸는 성모 마리아처럼 <토끼 관음상>은 관음보살의 그것을 닮은 풍성한 치마를 열어젖혀 치유가 필요한 모든 존재를 감싸 안는다.
작가가 강조하는 융합과 위로의 철학을 상징하는 <토끼 관음상>은 관람객들이 직접 치마 안으로 들어가 엄마의 치마폭 같은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 Sinus Spring, 2018 Tempera on Jute190 x 290cm
ⓒ By courtesy of the artist
1층 전시 공간의 무게 중심 역할을 하는 <토끼 관음상> 주위에는 자연과 인간, 동물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산수화가 전시돼 있다.
그중 오른쪽에 걸린 세 점의 대형 산수화 연작 <사이너스 스프링(Sinus Spring)>은 쐐기풀, 황마, 종이 같은 자연 소재를 이용해 존재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모든 자연에 신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과 동물은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
 
▲ 유리 조각품 2층에 전시된 유리 조각품
ⓒ By courtesy of the artist
 
1층 전시 공간이 수평선에 빛이 내려앉는 순간 같다면 2층 전시 공간은 수평선에서 빛이 사라지는 순간처럼 보인다. 작가가 유리 공예로 유명한 이탈리아 무라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다양한 유리 조각품 외에도 여러 점의 매혹적인 회화 작품과 설치 작품이 2층에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고요히 잠에 빠진 듯 가만히 누운 여자의 형상을 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2022 Galvanized Bronze (5/5)38 x 135 x 38cm
ⓒ By courtesy of the artist
 
고대 로마에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시가를 행진하는 개선장군 옆에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를 외치는 노예가 있었다. 오늘의 승리 앞에 우쭐대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풍습이었다고 한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바닥에 누운 레이코 이케무라의 <메멘토 모리>는 오늘의 승리에 한없이 들뜨거나 폐부가 찔린 듯 참기 힘든 고통에 눈물 흘리는 모든 현대인에게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시작이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존재의 다양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레이코 이케무라의 전시를 통해 예술이 주는 위로의 힘을 직접 느껴보기 바란다. 레이코 이케무라의 개인전 <수평선 위의 빛(Leiko Ikemura: Light on the Horizon)>은 오는 8월까지 헤레디움에서 진행된다.
 
▲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위의 빛 포스터
ⓒ 헤레디움
 
레이코 이케무라
 
▲ 작가  레이코 이케무라
ⓒ Xin Tahara
 
1951년에 일본 미에현 쓰시에서 태어난 레이코 이케무라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한 후 스위스에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로 거처를 옮겨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다. 전 세계 29개국에서 50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으며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 도쿄 국립 현대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현대미술작가 이케무라는 일본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의 독특한 조합을 추구해 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예술적 모티브가 된 수평선(horizon)을 주제로 한다. 시선이 닿는 곳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수평선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수많은 명작의 원천이 됐다.

이케무라는 일본의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하며 바다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고. 하지만 어느 날 도카이선 열차에서 바라본 수평선이 생경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작가를 사로잡았다. 작가는 존재의 다양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평안을 염원하고 예술을 통한 위로를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SNS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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