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파묘 열풍... 10년 뒤 개인 선산에 산소는"

황동환 2024. 6. 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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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지도사 손찬규 대표... 장례·제사 예법, 지역마다 다르지만 핵심은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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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환 기자]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다. 누구나 이 같은 자연의 섭리를 모르는 것은 아닐 터, 그러함에도 평소 고인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내일부터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인 장례식. 유족들은 장례식을 통해 고인을 추억하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동시에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덜기 위한 의식이기도 하다. 평소에 만날 일이 없어 그 존재조차 잊고 지내는 장례지도사는 고인의 죽음 앞에 경황이 없을 유족들이 고인과 잘 이별할 수 있도록 돕는 벗이 된다.
 
 ‘한용사’ 손찬규 대표. 기계공학도였던 그는 선친이 보유하고 있던 장의차 영업권을 밑천 삼아 시작한 장례업을 32년째 이어오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 <무한정보> 황동환
 
충남 예산군 삽교읍에 위치한 장의업체 '한용사' 손찬규(62) 대표. 그는 32년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유족들을 대신해 고인의 몸을 다루고 장례식을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삽교 두리 출신인 그는 삽교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영등포초 전학을 거쳐 청운초·중과 환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주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뒤 취업한 태양금속(서울 역삼동) 기계연구실에서 5년 동안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1993년 아버지의 병환 소식에 고향으로 내려와 시작한 장의업이 천직이 됐다. 그의 나이 30세에 시작한 일이다. 

부친은 예산 지역에서 건설업으로 승승장구하던 '대산건설' 창업주 손용언 회장(1998년 작고)으로, 손 대표는 2남 1녀 중 첫째다. 그는 "좋은 학교에서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해 학교를 여러 번 옮겼다"는 말로 기억 속의 부친을 소환했다. 한 살 터울 아내 김선옥(61)씨는 손 대표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 만나 1989년에 결혼했다.

한용사는 현재 손 대표와 막내 남동생 손찬호(57)씨가 같이 운영하고 있다. 한국화장품과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하던 남동생이 1997년 고향으로 내려와 합류했다. 

기계공학도였던 손 대표는 어떤 연유로 장례지도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대산건설이 부도가 나자 부친이 소일거리로 할 일을 찾던 중 획득한 장의차 영업허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장의차 영업은 큰 이권사업이었다고 한다.

손 대표는 당시 장례식장이 드물던 시절, 삽교읍처럼 농촌 마을로 형성된 지역에선 건어물 가게 주인이 장례일을 도맡았다는 의외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문상객이 3일 동안 먹고 지냈던 시절이다. 시골에서 한 번 상이 나면, 상가집에서 필요한 술과 제물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건어물 가게가 통상 장례 일도 처리했다"며 "한 번 상이 나서 진 빚을 3년 동안 갚아야 했던 시절이다. 이때 장의사는 한 번 장례를 치르면 논 두 마지기를 살 정도로 벌었다"고 말한다. 

주위에선 "어엿하게 대학공부까지 마친 사람이 장례업을 한다"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당시 직장에서 40만~50만 원 받던 것과 비교할 때 한 번 일에 200만 원은 괜찮은 수입이었다"고 한다. 그가 장례업에 뛰어든 또 다른 이유다.

그에 따르면 현재 삽교지역에서 손 대표처럼 사무실을 두고 장의업체를 운영하는 곳은 '한용사'가 유일하다. 그는 "당시 상가집에 가 본 적도 없고, 멋모르고 시작했다. 아는 게 없어 막막했다. 장례에 필요한 용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만 3년 걸렸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파묘 열풍’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현재 장례업체를 찾는 고객의 의뢰 내용 대부분은 이장이다. 손 대표가 한 의뢰인이 요구한 이장을 위한 파묘 작업을 하고 있다.
ⓒ 손찬규
 
보통 염할 줄 아는 사람이 동네마다 1~2명은 있었던 시절이라, 지인을 통해 염하는 방법을 익혔다. 2001년엔 공주대학에서 장례지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획득했다. 염습, 장례 절차, 유족들을 대하는 예법, 제사 양식 등을 배웠다.

주자가례를 독학하면서 전통장례예법도 익혔던 그는 "지역과 문중마다 제사 예법이 다르지만 핵심은 정성이다. 염은 단순하고 정갈해야 한다"며 장례 절차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염습은 24시간이 지나야야 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염습 전까지 마치 산 사람처럼 똑같이 하루 세 끼 밥과 국을 올린다. 문상을 가도 염습하기 전까지 절을 하지 않은 것이 예법이다. 염은 알코올로 고인의 몸을 닦는 것부터 시작한다. 삼베 수의를 입히고 관에 모신다. 염습 뒤 유족들은 상복을 입고 향을 피우고 문상객을 받는다.

당시 누가 상을 당하면 대부분 묘를 썼다. 인부 3~4명과 굴삭기를 동원해 산소를 조성한 뒤 영구차로 고인을 모시고 안장하는 일이 손 대표의 주된 업무였지만, 사회·문화적 변화와 맞물려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면서 그가 하는 일의 내용도 달라졌다.

그는 "10%였던 화장이 지금은 90%이상이다. 후손들이 산소로 썼던 땅을 활용하기 위해 지금은 파묘해 이장하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됐다"며 "납골당으로 이장하거나, 수목장 등으로 산골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지금 파묘 열풍이 불고 있다. 앞으로 한 10년 뒤면 개인 선산에 모시고 있는 산소의 절반은 사라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손 대표의 취미는 골동품 수집이다. 그의 사무실 1층엔 그동안 모은 옛날 물건들이 박물관을 차릴 정도로 가득하다.
ⓒ <무한정보> 황동환
 
손 대표의 사무실이 위치한 삽교 '한용사' 1층은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당연히 다양한 장례용품이 있을 것 같지만, 목재 탈곡기부터 한국전쟁 때 쓰였을 법한 회전식 무선 전화기까지 희귀한 골동품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산소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물들을 모은 것일까'라는 추측은 손 대표의 설명으로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는 "옛날 물건들에서 푸근함을 느낀다"며 "취미로 공동품들을 수집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집한 양을 보면 웬만한 소규모 박물관을 넉넉히 채우고 남을 정도이고, 눈으로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는 일이 없어도 준비 작업은 많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상주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공부한다고 한다. 
 
 개업 때부터 보관하고 있는 영수증과 산소 사진 파일. 그동안 자신이 염습한 시신만 2000구는 족히 넘을 것 같다고 한다.
ⓒ <무한정보> 황동환
 
상주에게 전하는 말 한 마디가 중요하기 때문인데, 경험담을 들려줬다. "파묘를 했는데 물이 많이 고여 있는 경우 유족들에게 적절한 말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가령 '물이 고여 있어도 땅속이니까 의미가 없다'고 안심시키는데, 이를 위해 나름대로 풍수지리 공부를 한다"며 "행여 유족들이 무당, 스님에게 천도제를 지낸다고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덧붙였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세대로 빠르게 전환되는 시대다. 시간이 갈수록 천편일률적이고 사치스러운 장례문화를 탈피하고자 하는 요구는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손 대표는 이미 미래의 장례지도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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