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까지 쩌렁, 귀 막을수도 없고”…대북 확성기 위력
정부가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 등 도발에 대응해 대북 확성기 방송을 검토 중인 가운데 북한이 대북 확성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위력적인 심리전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 군사회담 경력이 풍부한 한 예비역 장성은 “북한군 입장에서 보면 확성기는 목구멍에 박힌 가시와 같다”고 3일 연합뉴스에 설명했다. 남측 확성기 방송을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귀를 막고 안 들을 수도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확성기 방송은 전력망이 갖춰진 접경지역이라면 어느 곳에서도 시행할 수 있는 심리전 수단이다. 지상 고정 확성기 시설뿐 아니라 차량에 탑재된 이동식 확성기도 있어 접경지 이북의 목표지역을 골라 심리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
정부가 전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이 당일 밤 ‘오물 풍선 살포 잠정 중단’을 발표하며 한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도 대북 확성기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북한군은 이전에도 군사회담 때마다 확성기 철거를 줄기차게 요구해 온 바 있다.
고정식 확성기 방송은 출력을 최대로 높이면 야간에 약 24㎞, 주간에는 10여㎞ 떨어진 곳까지 도달한다. 차량에 탑재된 이동식 확성기는 고정식보다 10㎞ 이상 더 먼 거리까지 음향을 보낼 수 있는 성능을 갖췄다. 이는 개성지역을 비롯해 최전방에 배치된 북한군 부대 상당수가 들을 수 있는 성능이다.
밤이면 확성기 출력은 개성지역을 넘기도 한다. 고요한 밤 확성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래와 뉴스, 날씨와 같은 정보는 북한군 MZ세대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게 이 예비역 장성의 말이다. 북한군이 군사회담 때마다 확성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른 예비역 장성은 “남북 군사회담 때 북한군 대표는 ‘전선 사령관과 전사들은 (대북 확성기를) 당장 때려 부수자고 한다. 저들이 들고일어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들을 억누르고 있지만 마냥 그러지 못한다’는 식으로 철거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한군에 심리적 타격을 준 사례도 있다. 2004년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사고 당시 남측은 확성기 방송으로 이 뉴스를 전파했는데 북한군 최전방 병사들이 집에 보내는 안부 편지에 사고 소식을 썼다가 부대 검열에서 걸려 문제가 됐다고 한다.
2015년 북한의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북한군은 최전방 부대에 준전시 상황 근무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남북 고위급접촉이 성사되면서 긴장 완화 조치가 합의되자 우리 군은 확성기 방송으로 “이제 준전시 상태도 해제된다”고 알려줬다고 한다.
대북 확성기 방송 콘텐츠 가운데 날씨 예보는 즉각 효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인민군 여러분, 내일 빨래하지 마세요” “오늘 오후에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래 걷으세요”라고 하면 실제로 북한군이 예보에 맞춰 행동했다는 것이다.
확성기 방송이 대북 심리전 수단으로 주효함에도 재개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확성기 방송 재개로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돼 접경지 주민들의 불안감뿐 아니라 한반도 불안정성이 더욱 증폭될 수 있어서다.
군사회담 대표 경험이 있는 다른 예비역 장성은 “심리전 차원에서 매우 유용한 확성기 방송은 협상 카드로 삼아야 한다”며 “칼이 칼집에 들어 있을 때 억지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있듯이 유용한 협상 카드를 마구잡이 식으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부는 ‘9·19 군사합의’ 전체의 효력을 정지하는 안건을 4일 예정된 국무회의에 상정하기로 했다. 9·19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되면 대북 심리전의 핵심인 대북 확성기 방송과 우리 군의 최전방 지역 군사훈련을 가로막는 법적 제약이 풀린다.
다만 우리 군이 곧장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를 위한 절차를 마친 뒤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실제 가동을 저울질할 전망이다. 군 당국도 아직 확성기를 원위치시키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대북 확성기는 최전방 지역 24곳에 고정식으로 설치돼 있었고 이동식 장비도 16대가 있었지만,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에 따라 고정식 확성기는 철거돼 창고에 보관 중이고 이동식 장비인 차량도 인근 부대에 주차돼 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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