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오물' 김정은이 뒤집어쓴 꼴…9∙19합의 족쇄 풀 명분됐다

이근평, 오욱진, 왕준열 2024. 6. 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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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발이 우리 군의 손발을 묶는 족쇄처럼 작용해온 9·19 남북 군사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향후 우리 군이 취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가 다시 늘어나게 됐는데, 이처럼 다양해지는 경우의 수에 대해 북한이 더 큰 압박감을 받게 된 ‘오물 풍선’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NSC 상임위원회에서는 북한의 잇단 대남 오물 풍선 살포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대통령실

정부는 4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9·19 군사합의 전체 효력 정지안을 심의·의결했다. 앞서 전날(3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은 “남북 간 상호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9·19 군사합의 전체의 효력을 정지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 상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 대북 확성기 재개 방침을 정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북한이 오물 풍선 살포를 조건부로 중단하겠다고 태도를 바꾸자, 이런 상황 변화를 반영해 대응 조치를 논의한 결과다.

군 안팎에선 이를 두고 ‘플랜B’(차선책)를 먼저 가동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군 관계자는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가 ‘플랜A’(최선책)였다면, 북한이 오물 풍선 투척을 중단한 현 시점에서 플랜B를 우선 가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정부는 플랜A, 즉 확성기 방송 재개를 여전히 가장 강력한 선택지로 놓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국민 피해 등이 발생한 가운데 북한이 태도를 바꿨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태를 되돌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북한이 감내하기 힘든 조치에 착수하기로 했다”고 발표까지 했다.

실제 남북이 상호 간에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포괄적으로 규정한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하는 건 확성기 재개를 위해 필수적인 사전 절차이기도 하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특정해 금지한 건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이지만, 정부는 판문점 선언이 국회의 비준동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효력 정지 절차도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확성기 방송을 금지한 남북관계발전법(2021년 시행)은 ‘이 법 시행 전에 국회의 동의를 받아 체결ㆍ비준한 남북합의서’(부칙)만 준수하도록 규정한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결국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통해 정부는 플랜A를 여전히 준비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군사적 조치의 선택지를 다양화하는 실리도 챙긴 셈이다.

표현은 효력 정지이지만, 이는 사실상 폐기 수순이라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현 정부는 그간 군사합의를 대북 군사적 조치의 ‘걸림돌’로 여겨왔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대표적 폐지론자다. 신 장관은 장관 후보자 시절인 지난 9월 "군사합의로 군사적 취약성이 매우 많아져 반드시 파기해야 한다"며 “북한이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군사합의를 위반하고 있는 상황으로, 폐기를 통해 북한의 위협 대응을 위한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북한 도발 국면에서 군사합의를 비례적 대응책으로 꺼내들었다. 지난해 11월 북한이 정찰위성을 발사했을 때 비행금지 구역 설정 관련 조항(제1조 3항)을 효력 정지했다. 군의 전방 정찰 능력 복원이 북한 정찰위성에 상응하는 조치라는 논리였다.

지난 2일 경기도 시흥시 한 쇼핑몰 주차장에서 관계자가 북한이 살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물 풍선 잔해를 수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어 군 당국은 지난 1월 북한이 합의 상 적대행위 금지구역에서 잇따라 포병 사격 도발에 나서자 “적대행위 중지구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합의 이전에 실시했던 것처럼 서북도서와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 등에서 각종 사격 훈련을 재개한다고도 밝혔다. 비록 군 당국의 당시 발표는 국무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이후 훈련 역시 이뤄지지 않아 선언적 의미로 남았지만, 사실상 합의의 종언으로 풀이됐다.

반면 한편에선 군사합의를 대북 대응 카드로 쓰는 게 타당하느냐는 비판 여론도 상당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 위성 발사의 경우 9·19 군사합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남북 충돌 가능성만 키울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고 봤을 수 있다. 오물 풍선 살포와 위성항법장치(GPS) 교란 등 초유의 ‘복합 도발’ 행태에 남남갈등보다 정부의 적극 대응을 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뜻이다. 동시에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근거로 한 효력 정지를 통해 선언적 효과를 넘어선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군 내부에선 넓어진 선택지에 따라 전략적 모호성이 커지면서 대북 억제력 효과도 커질 것으로 기대한다. 군 당국자는 “군사합의 효력 정지 후 당분간 구체적 군사 행동을 ‘빈칸’으로 남겨놓는다면 북한 당국이 느낄 공포감은 더 커지지 않겠느냐”며 “합의 이전 수준으로 전방 사격 훈련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도 북한군이 느낄 피로감은 꽤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카드를 아껴두고 단계적으로 서북도서 포사격 훈련 등을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근평·이유정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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