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소명의식과 견줄 만큼 가치 있는 싸움인가
환자에 헌신하는 전공의들은
나름의 소명의식이 있었을 것
그들은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
가치 있는 싸움이었다 여길까
의도와 다르게 비치는 현실
바로잡으려면 병원에 돌아와
진짜 현장의 목소리 들려줘야
“자존심 때문이지”라고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 전문의가 되려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했지만 깊은 고민과 성찰이 있었을 것이라 느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의대에 진학하고 6년간 공부해서 의사가 된 후에도 인생 최고의 시기인 20대 후반~30대 초반의 4~5년을 더 바쳐 인턴·레지던트 생활을 견뎌낸 이들 아닌가. 전문의들에겐 쉽게 말할 수 없는 ‘소명의식’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다 많은 경험을 쌓아 환자에게 부족함 없는 의사가 되겠다, 더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력과 경험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제대로 된 도구로 쓰이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아닐까 그저 짐작했다.
2017년 10월 ‘전공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전공의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아야만 환자들이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외에도 몇 차례 전공의들이 등장하는 칼럼을 썼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간병하며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수술실 앞에서, 병실에서 만났던 전공의들의 모습이 소재가 됐다. 전공의들에게는 억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겠다고 썼던 이유는 그들의 헌신을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전문의는 의사 자격을 얻고 난 후 몇 년의 수련 과정을 더 거친다. 의사라는 이름은 6년 공부하면 얻을 수 있지만, 전문의가 되려면 10년을 넘게 해야 한다. 일반의와 전문의를 구별하는 이유다. 수술과 고난도 처치법을 익히는 것은 물론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환자를 치료할 때 다른 인력들과 효율적으로 협업하는 법, 대화가 통하지 않는 환자·보호자와 의사소통하는 법까지 모두 배워야 한다. 살인적인 업무량과 오래된 병원 시스템의 부조리 등도 버텨내야 한다. 소명의식이 아니라면 이유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험난한 과정이다.
그런 과정을 버텨내고 있던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지 100일을 훌쩍 넘겼다. 병원 바깥의 전공의들이 지금의 상황을 오래 전부터 지켜왔던 신념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 싸움이었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의대 증원 반대’가 평생 준비하고 쌓아올려온 소명의식을 버려도 될 만큼 가치있는 명제였을까. 지금까지의 투쟁이 그저 그런 의사는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으로 버텨온 삶을 던져버려도 아쉽지 않은 과정이었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공의들은 대한의사협회(의협)가 대변하고 있는 ‘의정갈등’의 당사자다. 의협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수가 협상에서도 ‘10% 인상’을 고집하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건강보험 가입자들의 부담이나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치과나 한의원, 약국은 수가를 2.8~3.6% 올리는데 병원만 수가를 10% 인상하자고 해 의사들을 잇속만 차리는 집단으로 만들고 있다. 필수의료 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유형별 환산지수 차등 적용에도 반대하고 있다. 수술·처치에 대한 수가를 검체·영상 검사 등보다 더 많이 올리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인데 의원급 병원의 이익을 위해 필수의료에 대한 지원을 막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온다. 필수의료에 대한 지원을 막는 것이 소명의식을 갖고 전문의가 되려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지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은 알기 힘들 것이다. 전공의들이 택한 그 길의 이유를, 가슴 속 깊은 응어리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기 그지없다. 오랜 기간 준비해왔던 가치를, 많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왔던 소명의식을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으면서 버리는 것처럼 비치는 현실이 안타깝다. 전공의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앞서 정부에 7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는 ‘의대 증원 백지화’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요구사항 중 수련병원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등은 전공의들이 현장에 있어야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다. 전공의가 수련 기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문의를 많이 뽑을 수 있으며 현장 전공의들의 목소리 없이 어떻게 전공의 수련환경이 개선되겠나.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돌아와서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환자들을 위하는 길이요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 길이다.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까지 전문의가 되고자 했던 스스로의 소명의식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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