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대 정부 어떤 업적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나
한국 현대사 장식한 주요 정책과 업적
이견이 없었던 업적들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잘못을 파헤치는 것보다 ‘잘한 일’을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마음이 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연구자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비판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찾아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기에 ‘잘한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역시 적지 않게 부담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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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분야 전문가에게 역대 정부의 업적 꼽아달라고 주문했더니
이승만 농지개혁·한미방위조약, 박정희 경제개발은 모두 동의
올림픽 유치, 유엔가입, 하나회 척결, 남북정상회담도 이견 없어
업적 평가 기준, 공동체에서 개인 행복으로 이동하는 경향 뚜렷
」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가능하면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았다. 역사학이나 정치학 전문가들처럼 역대 정부의 정책을 가장 넓게 이해하고 있는 분들 외에 사회학, 의학, 자연과학, 공학, 문화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성별과 연령도 고려했다. 성별에 따라 양성평등 관련 업적에 대한 가중치가 달랐고, 연령에 따라서도 강조하는 분야에서 차이가 났다.
분야나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의하는 업적들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의료보험, 전두환 정부의 경제안정화 정책과 서울올림픽 유치, 노태우 정부의 남북한 유엔 가입과 한중수교,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정부의 금융위기 극복과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한일 신파트너십 선언 등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는 업적이었다.
업적 선정의 어려움
업적을 찾기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우선 장면 정부(1960-1961)와 최규하 정부(1979-1980)의 경우가 그랬다. 무엇보다도 성과를 내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았다. 장면 총리는 9개월에 채 안 되는 재임 동안 혁명 과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담 외에도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 내 신구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책을 입안하거나 실시하기 어려웠다.
최규하 대통령의 경우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전임 대통령의 유고로 인한 과도정부라는 국민적 인식이 컸다. 4·19 혁명 직후의 허정 과도정부와 유사했다. 정부 스스로도 헌법개정 후에는 물러나겠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더해 12·12 군사정변 이후 강력한 신군부가 정권의 배후를 흔들고 있었다.
업적 선정 과정에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도 있었다. 전문가에 따라 강조되는 성과가 서로 다를 때 이를 세 개로 추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의 경우 경부고속도로, 그린벨트, 중화학공업화, 군수산업 등에서 세 개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 역시 88 올림픽, 고속철도, 인천공항, 신도시, 한·러 수교 등 중요한 업적들이 적지 않았다.
이견이 나타났던 이유
노무현 정부 이후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업적 선정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사회적으로 이견이 없는 업적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많은 성취가 있었음에도 사회적으로 이견이 없는 업적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전 정부에 있어서도 평가에 있어 이견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견이 발생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로 지금 시점에서 평가하기에는 20년도 안 된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일정한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업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기에 ‘긍정적 방향’이라는 큰 기준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일까?
둘째로 2000년대 이후 사회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떤 업적이나 사건이든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른 평가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 질병관리본부의 설립 업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는 없었지만, 한미 FTA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 시기의 녹색 성장 정책도 논란이 된 이슈였다.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시기의 방역이나 신남방정책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었지만, 2017년의 한반도 긴장을 해결하면서 개최됐던 2018년 평창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북미정상회담 같은 외교적 성과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주목되었던 이슈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분야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업적도 있었다. 우선 1960년대 이후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기술원(KIST),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의 설립은 과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개발도상국의 발전과정에서 자금과 과학기술의 부족이 가장 중요한 어려움인데, 그중 하나인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면서 경제성장의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다.
1980년대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반도체공업 육성계획(1981)을 꼽는 전문가가 있었지만, 더 주목된 것은 해외여행 자유화(1988)였다.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 초 교복과 두발 자유화, 통행금지 폐지를 중요한 성과로 선택한 전문가도 있었다. 2000년대에는 쓰레기 분리수거, 주5일제 근무, 호주제 폐지 등이 중요한 업적으로 제기되었다.
2010년 이후에는 아덴만 사건 시 여명작전과 함께 청탁금지법 제정, 대체휴일제 도입에 주목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국민 하나하나의 생명을 중요시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정책을 부러워했던 한국인들에게 여명작전은 하나의 감동이었다. 대체휴일제 도입은 산업성장 시대의 장시간 근로에서 행복의 시대로의 전환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평가 기준의 변화
전체적으로 보면 점차 국민 개개인의 행복과 복지에 더 많이 치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복 및 두발 자유화, 해외여행 자유화는 그 대표적 사례다. 전 세계에서 가장 근면하고 장시간 노동을 했다는 성장 신화보다는 이제 주 5일제 근무와 대체휴일 제도가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등장한다.
산업화라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성장이 아니라 혁신에 방점을 둔 성장에 더 많이 주목받았다. 과학기술처의 설립이나 반도체 분야로의 산업 전환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마도 20년 전 교과서를 썼다면 역대 정권의 업적에서 빠질 수도 있는 내용이다.
21세기 이후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재난에 대한 대응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질병관리본부의 설립과 함께 2020년 이후 코로나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일부 이견도 있었지만, 3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2016년 정부에 대한 사회적 불만에는 세월호 사건과 함께 2015년의 메르스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역시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사실과 대비된다.
이상과 같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의 업적을 살펴보면 산업화 및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났던 업적과 민주화 이후 나타난 업적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보인다. 민주화 이전의 업적들이 대부분 국가 공동체적 기준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업적들이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국민 개개인의 삶과 관련된 업적이 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변하지 않는 기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 전체를 포괄하는 공통적인 이슈가 있었다. 바로 평화의 문제이다. 평화와 안정을 위한 업적들은 시대적 변화와 관계없이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미동맹이나 군수산업의 발전은 전쟁 억지력의 관점에서, 남북 간의 대화와 합의는 그 결과의 지속 여부와 관계없이 중요한 업적으로 주목되었다.
시기에 따라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치지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7·4 공동성명,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992년 한중수교, 2000년 이후의 남북정상회담은 3대 업적 중 하나 또는 역대 정부의 주요한 성과로 평가받았다. 상대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공격적 정책보다는 억지력의 마련과 대화에 더 후한 점수가 주어졌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새로 인식하게 된 기준, 그리고 시대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기준은 모두 앞으로 한국의 지도자들이 어떤 관점에서 정책을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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