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선] ‘전 국민에 25만원’ 밑자락 깔아준 정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5만원으로 정부 여당을 요리하고 있다. 처음엔 전 국민 25만원 일괄 지급을 제안했다가 지난주엔 차등 지원도 검토할 수 있다고 다시 카드를 냈다. 당초 국민의힘은 25만원에 발끈하며 반대했다. 그러다 총선 참패 직후엔 당 일각에서 차등 지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겠냐는 얘기도 나오면서 이 대표의 말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러니 이재명 야당이 노련한 여당 같고, 정부 여당은 전혀 수를 준비해 놓지 않은 하루살이 야당 같다.
25만원은 4·10 총선을 2주 남짓 앞두고 이 대표가 전격적으로 꺼낸 제안이었다. 4년 전 총선 때 코로나 극복을 명분 삼아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풀었던 전례를 떠올리게 하며 역풍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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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 앞 민생토론회, 선심성 빌미
선거 참패로 정책서도 끌려다녀
정치적 손해 감수, 미래 챙겨야
」
전 국민 25만원, 가구당 100만원이면 대충 13조원이 든다고 한다. 13조원이 얼마나 큰 돈일까. 올해 국방예산 중 급식비가 1조9900여억원이다. 13조원이면 50만 장병이 한 해 세끼를 먹는 비용의 7배에 육박한다. 전 세계에 167곳의 재외공관을 거느린 외교부의 올해 예산은 4조1900여억원으로, 13조원의 3분의 1에 못 미친다. 참고로 올해 여성가족부 예산은 1조7000여억원인데 13조원에서 부스러기만 떼와도 한부모가족, 아이 돌봄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현재 한국전력 총부채가 203조원인데, 13조원을 일단 여기에 쓰고 전기요금 인상을 늦추는 방법을 검토할 수도 있다.
13조원은 이처럼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정부 여당은 이 대표의 자신감에 찬 요구를 받아치지 못한 채 수세에 몰려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총선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25만원씩 13조원 투하’를 꺼낸 정당을 상대로 집권 여당은 의석 300석 중 겨우 100석을 넘겼다. 그러니 끌려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이 대표가 연루된 쌍방울 대북송금 수사를 뒤집으려는 특검법안을 발의하는 등 대놓고 국회를 사유화하려 하는데도 정부 여당은 이를 막을 동력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전례를 찾기 힘든 20%대다(한국갤럽).
수세에 몰린 또 다른 이유는 정부 여당 역시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정책 남발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주재한 24차례의 민생토론회가 그렇다. 대형 개발사업, 지원사업을 잇달아 발표했는데 이미 검토 중이던 정책을 발표한 것도 많지만, 새롭게 꺼내든 것도 여럿 있었다. 예컨대 국가장학금 수혜자를 50만명 더 늘린다고 약속했는데, 단순 계산으로 50만명에게 한 해 100만원을 지원하면 5000억원이 추가로 들어간다. 이 돈을 어디서 마련할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당시 거의 하루 걸러 열리는 듯한 민생토론회를 놓고 들었던 생각은 민주당이 과연 보고만 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민주당도 참전했는데 4년 전의 전 국민 지원금 지급이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보수층의 지지에 기반한다. 보수가 특히 경계하는 게 국민에게서 걷은 세금을 헛되이 쓰는 것이다. 그러니 나랏돈을 쓰는 것으로 야당과 경쟁할 땐 윤 정부와 보수 여당은 주도권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다. 분배가 당론인 민주당을 당할 수가 없고, 보수 지지층의 신뢰도 흔들린다.
민주당을 상대로 집권 세력의 책임감을 부각하지 못하고 결론을 미루다가 역시 수세에 몰린 게 국민연금 개혁이다. 연금 고갈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더 내되 지금보다 더 받을 수는 없다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공론화위원회에서 내놓은 안은 내는 돈(보험료율)을 늘리면서 받는 돈(소득대체율) 역시 늘리도록 했다. 정부 여당은 공론화위원회와 국민을 상대로 ‘더 내되 더 받을 수는 없다’고 설득했어야 했지만 총선을 앞두고 입을 닫았다. 그래 놓곤 민주당이 ‘더 내고 더 받는 안’에 합의하라고 요구하니까 분노한다. 연금 고갈을 걱정했다면 이번에 결론을 내되 대신 22대 국회에서 받는 돈을 줄이는 조건으로 합의하자는 역제안이라도 내놨어야 했다.
보수 정부·여당이 진보 야당과 세금을 쓰는 것으로 경쟁해선 이길 수 없다. 지금 국민에게 나눠주지 않아서 지지율이 무너진 게 아니다. 총선에 참패한 정부 여당이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국민 앞에 뼈를 깎는 인적 개편과 천막당사를 뛰어넘는 반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대통령실이나 여당이나 그런 기미는 전무하다. 이럴 바에야 당장의 지지율 회복에 매달리지 말고 차라리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미래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라를 위해 낫다.
채병건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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