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를 살게 해주는 것들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가며 오히려 올해의 시작을 되돌아본다. 보신각 타종 생중계를 함께 지켜보던 연인이 ‘올해의 순간’을 꼽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새해가 30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열에 들떠 한 해를 돌이키는 연인과 달리 나는 좀 시무룩했다. 나는 그런 결산을 즐기지 않는다. 삶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다면 비(悲)가 앞서고 희(喜)가 맨 뒤에 나열될 거라고 믿기에 우울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금방 잊는 편이다. 올해의 음악이나 영화뿐 아니라 올해의 인물, 올해의 축복 같은 카테고리를 짚어나가며 마음이 무지근해졌다. ‘결산할 것이 슬픔뿐이면 어쩌나?’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고.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내 차례가 되자 그해의 가장 빛나던 순간과 사람들이 마구 떠올랐다. 후에는 연인보다 내가 더 벅차 없던 카테고리까지 만들어가며 대화를 이었다.
올해의 어린이는 횡단보도에서 만났어. 보행자 신호에 양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그 목소리가 참 맑고 듣기 좋더라. 올해의 평안은 너랑 우연히 들렀던 가정식 식당에서 누렸어. 날도 덥고 계획도 다 어긋나서 속상했는데, 어쩌다 들어간 그곳의 생선튀김이 맛있었고 주인이나 손님도 다들 친절했잖아. 그 따뜻함에 여독이 다 씻기더라. 추산해 보니 불행은 강도만 높을 뿐 빈도는 적었다. 내 지난날을 버티게 해준 건 억센 불행이 아닌, 잔잔하지만 명징한 행복이라는 걸 깨달으며 올해의 첫 종소리를 들었다.
한 해가 반쯤 지났는데도 여전히 나는 슬픔을 자주 느끼고 곱씹는다. 떨쳐낼 수 없는 오랜 악습이다. 슬픔의 지층이 두꺼워질 때마다 사진첩을 들춰본다. 작가 후기나 인터뷰에서 종종 언급한 적 있지만, 내 사진첩에는 ‘나를 살게 해주는 것’이라는 폴더가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 가족과 나눈 문자메시지, 독자들이 남겨준 애정 어린 서평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 귀한 마음을 눈으로, 가슴으로 담아본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곤 해요. 그러면 기분이 나아지고 조금은 덜 슬퍼져요”라는 ‘My favorite things’의 노랫말처럼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단단해지려던 슬픔이 서서히 부드러워지곤 한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을 때가 많지만, 결국 나를 치유하는 대상도 사람이다. 그것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다행스럽다.
근래에 파주에서 줌 토크를 했다. 48명의 독자와 1시간가량 같은 화면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으나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독자들의 반응과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주 댓글 창을 살폈던 것 같고. 말주변이 없는 나에게 박수 이모지와 하트를 보내며 다들 다정한 마음을 기꺼이 건넸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혐오가 만연하는 시대에 다정을 지켜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활 속에서도 그러한데 글이라고 다를까. 나부터도 누군가의 글을 뾰족한 시선으로 독해하는 걸 더 쉬운 방식으로 여긴다. 누군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읽는 건 힘겨운 일이지만 또 누군가는 그 일을 해낸다. 나는 읽는 이들로부터 그것을 배운다. 줌 토크가 끝나기 전,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러보았다. 령윤, 이음, 지혜, 하나, 캔들, 준민, 산타…. 모니터의 안과 밖이 한데 이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 밤을 갈무리했다.
나는 결산을 즐기지 않지만, 소설을 탈고하거나 책을 묶을 때면 집필 기간 동안 내가 느낀 것과 남긴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 한다. 부지런히 썼으니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 짜릿함은 길지 않다. 성취나 업적을 위해 쓰다 보면 집필이 충족이 아닌 결핍이 돼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기도 했고. 지적 재산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나를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은 아니다. 결국 글을 쓸 때마다 유일하게 축적되는 건 누군가의 독려와 사랑인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온전히 채워주고, 살아가게 만든다. 줌 토크를 마치고 사회를 봐준 마케터님이 그날의 댓글을 모음집으로 만들어 메일로 보내주었다. 이 역시 ‘나를 살게 해주는 것’ 폴더에 담아두고 종종 꺼내 본다. 간혹 그들이 건넨 사랑에 비해 내가 꺼내놓은 사랑이 한없이 작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도 있다. 자주 이 사랑에 관해 언급해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내 글을 읽어준 당신께, 내 슬픔까지 기꺼이 끌어안아주는 당신께 귀에 못이 박이도록 전하고 싶다. 내게는 귀해요 당신이.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