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과 뉴욕이 함께한 순간

손다예 2024. 6.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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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2024 가을 컬렉션에서 바라본 뉴욕식 실용주의.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프린트한 룩.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프린트한 룩.

디올의 2024년 가을 컬렉션을 위해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뉴욕을 선택했다. 이전처럼 상상력 넘치는 미지의 공간이나 낯선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이국의 도시가 아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디올 하우스 역사 중에서 1967년 기성복 컬렉션 ‘미스 디올’을 선보이며 단순함과 실용에 바탕을 둔 마크 보한의 시대에 주목했고, 실용주의 패션의 도시 뉴욕을 주제로 삼았다. 무엇보다 치우리가 패션을 통해 피력하고 싶은 가치는 뉴욕을 가리켰다. 치우리는 2016년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후 매 시즌 컬렉션으로 여성을 표현하고 사회가 정의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길 촉구한다. 그에겐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 곧 아름다움이다. 치우리가 보여주는 디올 룩의 독보적인 구조와 커팅, 소재, 다양한 아이템의 조합은 패션이나 쿠튀르에 갇히지 않고 여성의 삶에 다가갈 수 있는 기능을 추구한다. 치우리의 가치를 담은 파리발 뉴욕행 컬렉션은 브루클린 뮤지엄에 안착했다.

쇼 직전에 비즈 드레스를 마무리하는 모습. 디올 하우스의 쿠튀리에 정신이 돋보인다.

세트장에는 손 모양의 네온 설치물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설치물은 이번 컬렉션의 주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양손을 날개처럼 펼쳐 엄지와 검지를 맞대 모양을 만든 마름모꼴은 여성의 질을 형상화한 것으로,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시위에서 사용된 표식이었다. 카르네 베일과 제임스 손힐로 구성된 예술가 컬렉티브인 클레어 폰테인(Claire Fontaine)은 1970년대 초의 페미니즘을 담은 수잰 산토로의 저서 〈새로운 표현을 향하여 Rivolta Femminile〉에서 영감받아 2023년에 네온 설치물로 만들었다. 치우리는 클레어 폰테인에게 이번 컬렉션을 위해 설치물을 새롭게 만들어주길 요청했고, 그렇게 쇼의 주제가 예술로 응집됐다. “조명 설치물은 여성 재봉사와 큐레이터, 제작에 참여한 여성들의 손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설치물은 예술가 수잰 산토로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찬사입니다.”카르네 베일은 네온 설치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치우리가 얼마나 클레어 폰테인의 작품과 수잰 산토로의 책에 진심인지는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뉴욕의 상징적인 신문을 재해석한 새들 백.
간결함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룩.

형형색색의 네온 설치물 아래 런웨이 바닥에는 클레어 폰테인이 활동하는 지역인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타일이 깔려 있었고, 뉴욕과 파리라고 쓰인 팬츠와 오버사이즈 가죽 코트를 입은 첫 번째 모델이 등장하면서 쇼가 시작됐다. 화이트 셔츠와 넥타이, 영국 남성복 원단 셀렉션에서 가져온 트위드, 다양하게 변주되는 수트, 페도라와 1940년대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은 단번에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떠올리게 했다. 파리와 뉴욕의 문화를 잇는 동시에 여성의 독립적인 스타일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모티프로 했다는 대목에서 치우리의 치밀한 시각적 서사가 드러났다. 여성이 원하는 대로 복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일깨워준 디트리히를 기리기 위해 수트에 집중한 것인지, 수트에 집중하기 위해 디트리히를 채택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컬렉션은 수트와 디트리히의 모든 것을 탐구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무채색 컬러 팔레트의 룩들.
자유의 여신상을 재해석한 정교한 자수가 레이디 디올 백을 수놓았다.
쇼를 앞두고 룩을 피팅한 모델의 워킹을 지켜보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영화 〈모로코〉 속에서 마를레네가 착용했던 넥타이와 페도라는 컬렉션 곳곳에 배치됐고, 영화 속 나이트 클럽 신에서 입었던 톱 햇, 화이트 웨이스트 코트, 블랙 테일스 룩도 등장했다. 몇 개의 재킷은 디트리히가 디올에 의뢰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재킷은 와이드 팬츠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펜슬 스커트와 매치했고, 박시한 테일러드 재킷과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바 재킷도 있었다. 그렇다고 허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진 않는다. 여성의 몸은 한 가지 실루엣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치우리의 주장은 이번 컬렉션에도 드러났다. 1940년대 디바에게 빼놓을 수 없는 비즈 슬립 드레스와 프린지, 댄스 플로어와 현대 브로드웨이를 떠올리게 하는 이브닝 가운도 런웨이를 채웠다. 덕분에 쇼는 남성성과 디바의 치명적인 매력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발했다. 쇼는 과거를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큼직한 코트 아래로 드러난 레이스 슬립 드레스는 카나주 모티프가 돋보이는 퀼팅 나일론 소재를 사용하고 드레스에 해머드 새틴, 크러시드 벨벳, 크레이프를 사용해 소재 배치 방식에 변화를 줘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었다.

컬렉션에 힘을 더하는 요소로 사용된 성조기 프린트.
컬렉션에 힘을 더하는 요소로 사용된 성조기 프린트.
뉴욕의 현대적이면서도 쾌활한 분위기를 표현한 룩들. 화이트 셔츠와 데님의 조합, 메탈릭한 프린지 디테일, 커다란 타이포그래피 디테일이 돋보인다.
뉴욕의 현대적이면서도 쾌활한 분위기를 표현한 룩들. 화이트 셔츠와 데님의 조합, 메탈릭한 프린지 디테일, 커다란 타이포그래피 디테일이 돋보인다.
뉴욕의 현대적이면서도 쾌활한 분위기를 표현한 룩들. 화이트 셔츠와 데님의 조합, 메탈릭한 프린지 디테일, 커다란 타이포그래피 디테일이 돋보인다.
치우리의 시각적 서사는 무슈 디올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파리~뉴욕 여행을 다룬 챕터로 이어지며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을 통해 두 도시와 대화를 시도했다.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의 마천루가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은 수채화처럼 손으로 그린 프린트로 실크 트랙 수트와 드레스 등 다양한 아이템에 사용됐다. 에펠탑 모티프의 심리스 피코트,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 미국 국기 프린트 스웨트셔츠와 트랙 팬츠, 로고 트랙 수트, 치우리가 사랑하는 데님, 여성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를 연상시키는 가죽 애비에이터 재킷과 스커트의 매치는 프랑스 감성으로 해석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의상 곳곳에 은밀하게 녹아든 별과 은방울꽃, 클로버, 벌 등 디올의 시그너처 코드를 발견하는 재미가 컬렉션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치우리가 꾸린 컬렉션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속엔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와 브랜드의 전통 사이의 ‘티키타카’가 있고,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이야기가 흘러갈 수 없을 만큼 컬렉션 피스들이 촘촘하게 짜여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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