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서 '구원의 길' 찾다

김삼웅 2024. 6. 3. 14: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 6] 삶의 지향을 동학에 입도함으로써 해결

[김삼웅 기자]

 동학농민혁명군상
ⓒ 황광우
 
어느 시기 누구라도 청춘기에 진로를 앞두고 고민·번뇌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한말 서민층 자제들의 경우는 특히 심했을 터이다.

중인 신분의 곤궁한 집안에서 태어난 춘암은 정직한 가풍을 이어받았다. 11세에 한학을 공부하고 지가서와 의서 등을 익혀 생활에 보탬이 되려 하였지만 가정 형편에 그만두고 농사에 매진했다. 변혁기의 한 가문에서 피지배층의 힘든 삶을 겪었던 청년기 춘암은 세상을 건지고 자신의 삶을 바꿔 줄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았다. 29세이던 1883년 봄 춘암은 동학에 입도해 자신이 찾던 삶의 지향을 동학에 입도함으로써 해결했다. 

그는 해월의 지도를 받으며 동학의 심오함을 알게 되고 10년의 기한으로 동학 수학에 들어갔다. 그의 근면하고 성실한 동학수행은 덕산 일대에 널리 알려졌고 내포 일대의 동학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주석 1)

한 사람의 인물이 성장하기까지는 가정사와 함께 주위 환경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인문지리적 환경 또한 박인호의 성격과 인성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부친의 인성교육이 정직한 인품을 갖게 했다면, 예당 평야라는 풍요로운 자연환경은 그를 포용력을 갖춘 인격체로 성장시켰다. 어린 시절 받은 자연교육과 인성 교육으로 형성된 정직함과 포용력 안에는 이미 그의 미래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그의 인생의 중후반 그 씨앗은 발아되어 꽃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천도교 교단을 지킬 수 있었고 6.10만세운동이나 신간회활동에서 보여준 이념을 초월한 포용력과 천도교를 신파와 구파로 갈라놓고자 한 일제의 분열책에서도 통합의 정신으로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꽃은 이제 열매를 맺어 동학의 세계화의 기반이 되었다. (주석 2)

'새로운 그 무엇'의 길을 인도받은 춘암은 그 실체를 찾아나섰다. 동학의 제2대 교조 해월 선생이 충청도 단양 장정리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먼 길을 걸어 가르침을 받고자 나섰다.

"춘암이 사는 덕산에서 단양까지는 약 200㎞에 달하는 먼 거리로 당시의 교통 상황으로는 4~5일은 걸려야 당도할 수 있었다. 춘암에게 그 긴 거리는 힘든 거리가 아니었다." (주석 3)

이 시기 '새로운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의식청년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백범 김구도 포함되었다. 김구가 황해도 해주에서 충청도까지 해월 선생을 찾아가 입도하는 과정, 해월의 인상 그리고 이들보다 조금 먼저 입도한 춘암을 그곳에서 보았다는 기록이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수고로이 왔다고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좋게 났는데 약간 검은 터럭이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큰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화로에 약탕관이 김이 나고 끓고 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한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孫應九),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주석 4)

김구와 황해도 동학 일행은 각각 '접주'의 첩지를 받고 귀향하였다. 첩지에는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고 김구는 회고했다.

주석
1> 성강현, <춘암 박인호의 동학수행과 동학농민혁명 활동>, <내포동학혁명과 춘암 박인호> 50쪽, 동학학회, 2024.
2> 조극훈, <춘암 박인호의 동학사상과 역사인식>, <내포동학혁명과 춘암 박인호>, 142~143쪽.
3> 성강현, 앞의 책, 45쪽.
4> 김구, <김구 자서전 백범 일지>, 32~33쪽, 국사원, 194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