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확성기 원점 재검토는 없다" 언제든 틀 수 있게 '방아쇠' 준비

이유정, 박태인, 왕준열 2024. 6. 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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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일 육군 9사단 교하중대 교하소초 장병들이 경기도 파주시 민간인 통제구역 내 설치돼 있는 고정형 대북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부의 대북 확성기 재개 방침 발표 5시간 만에 북한이 ‘오물 풍선’ 살포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정부가 추후 조치와 관련한 실무적 논의에 착수했다. 북한의 ‘나쁜 행동’을 멈추게 한 것만 해도 일단 성과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정부 내에서는 이미 국민 피해가 발생한 이상 뽑은 칼을 그냥 거둘 수는 없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방송 재개라는 ‘방아쇠’를 지금 당기지는 않아도, 실탄을 채워 넣은 채 언제든 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복수의 정부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북한의 태도 변화를 반영해 부처 협의 등을 거쳐 대응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면서도 “확성기 재개 결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제로 베이스’ 방향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2일 발표한 확성기 재개를 위한 ‘조치 착수’라는 기본 입장은 유지하는 가운데 북한의 반응에 따라 사전 준비와 실제 방송 재개 등으로 단계를 나눠 대응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2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대통령실에서 최근 북한의 대규모 오물 풍선 살포, 위성항법장치(GPS) 교란,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우리에 대한 복합도발 관련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긴급 NSC상임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이를 위해 북한이 다양한 방식의 도발을 재개할 경우 언제든 곧바로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준비 작업은 계속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으로 군은 의사결정만 내려지면 언제든지 전개가 가능하도록 대북 확성기 점검을 강화하는 등 대비 태세를 가다듬고 있다. 이성준 합참 공보실장은 3일 정례 브리핑에서 “군은 즉각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준비와 태세를 갖추고 있다”면서 “다만 군은 임무가 부여되면 시행하는 곳으로, 관련 절차는 정부 기간 관 논의가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지역에 국한해 해체해 보관 중이던 확성기를 다시 설치해 놓거나, 고성능 이동형 확성기의 가동 준비 태세를 갖추는 방안도 거론된다.

법적으로는 확성기 방송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모든 적대 행위 금지를 규정한 같은 해 9·19 군사합의 등 남북 간 합의의 일부 조항을 효력 정지해야 확성기 방송 재개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남북 합의서 효력 정지를 위한 국무회의 의결 등 관련 절차를 밟아 놓으면, 이후 북한의 도발 정도에 따라 언제든 확성기를 다시 틀 수 있게 된다.

실제 오물 풍선 등으로 인해 이미 우리 국민의 피해가 발생한 만큼 정부가 확성기 재개 방침을 원점 재검토로 되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지난달 28일부터 2일까지 최소 10kg 상당 오물 풍선 약 1000개를 날려 보내면서 차량 파손 등 물적 피해가 이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간다면 실질적 피해를 일으킨 북한의 민간인 대상 도발에 사실상 아무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여기엔 ‘북한의 말’만 믿고 ‘우리의 행동’을 바꾼다면 윤석열 정부가 비판해온 전임 정부의 대북 기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판단도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일 국가안보회의(NSC) 긴급 상임위원회에서 확성기 재개 방침을 결정한 뒤 기자들과 만나 2020년 6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의 대북 전단 비난 담화가 있은 뒤 문재인 정부가 ‘대북 전단 금지법’을 도입한 과정을 거론했다. 그는 “이번 오물 풍선 살포 역시 우리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정부의 대북 정책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는 똑같은 행태”라며 “우리 정부에는 이런 더러운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싱가포르·워싱턴서 전방위 여론전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2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계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정부는 이번 결정을 위해 국제 여론전을 전방위로 펼치는 등 치밀한 준비 과정도 거쳤다. 지난달 28~29일 오물 풍선 사태가 처음 발생했을 때만 해도 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의도적인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대응을 검토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2일 북한이 직전의 두 배가 넘는 풍선 물량을 투척하고, 물질적인 피해까지 나오자 원칙적·비례적 대응 기조로 태세를 전환했다.

이를 위해 국내외에서 대북 압박 환경을 조성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NSC 개최 직전인 2일 오전 싱가포르 샹그릴라 대화(아시아안보대화)에서 미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과 회담하며 북한의 오물 풍선 사태를 거론했다. “이번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행위는 명백하고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유엔사를 통한 공식적인 조사를 적극 지원하겠다”면서다. 신 장관은 또 공개 연설을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 국방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를 거론하며 “정상국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졸하고 저급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에서 개최된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에서도 대북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3국 외교 차관은 5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북한의 소위 ‘군사정찰위성’ 발사(5월 27일)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면서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심각 하게 위협하는 도발”이라고 규탄했다. 당시 북한의 27일 군사 정찰위성 도발, 28~29일 1차 오물 풍선 살포, 30일 초대형 방사포(단거리 탄도미사일) 도발 등이 이어지던 시점이었다.

2일 NSC 긴급 상임위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특히 대통령실 관계자는 NSC 회의 결과를 설명하며 ”대북 확성기를 곧바로 튼다”고 밝히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만 했는데, 대북 확성기의 설치·방송 송출 등을 단계별로 전술화해 북한의 반응과 여론 동향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유정·박태인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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