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위기론 속 주목받는 이건희 '신경영 선언'
이재용 회장,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등 '뉴삼성' 기술 혁신 과제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는 질(質)경영이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혁신 주문은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삼성을 비롯한 모든 기업에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다. 완전히 새로 태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남의 뒤꽁무니만 쫓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은 모든 기업에게 적용된다.
이 선대회장의 특명은 신성장동력을 마련하지 못한 채, 경쟁사에 반도체 기술 추격을 허용하고, 노조의 강경 노선에 흔들리고 있는 삼성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영원한 위기 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도 두려움 없는 실험으로 대표되는 그의 리더십을 새롭게 되새기고 과감하게 적용해야 할 때다.
'신경영' 선언으로 '질' 중심의 경영체제 구축…초일류 기업 이끈 리더십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백 명의 삼성 임직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그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라는 특명을 내린다.
미국 LA 전자 제품 매장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 삼성 TV와, 세탁기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이 회장은 삼성이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신경영 선언'은 삼성이 명실상부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트리거(방아쇠)로 작용한다.
익숙함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혁신에는 고통이 따랐다. 1995년 막대한 손실을 각오하고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불구덩이에 던진다. '최고의 품질'로 무장하지 않으면 휴대폰 뿐 아니라 TV, 생활가전 시장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품의 질적 향상과 혁신 주문은 반도체에서 결실을 맺는다. 신경영 선언 다음 해인 1994년 업계 최초로 256Mb D램 개발에 성공한다. 2년 위인 1Gb D램을 개발한 뒤 1998년에는 128Mb 플래시 메모리 수출을 시작한다. 2003년에는 플래시 메모리 시장 점유율 최고 수준을 달성하며 반도체 하면 삼성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킨다.
디자인의 질적 변화도 이 때 이뤄졌다. 삼성전자는 1996년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하며 고유의 철학과 혼이 깃든 디자인 정체성을 구축하고 국내외 창의적 인재 양성에 힘썼다. 6년 뒤인 2002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직접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일명 '이건희폰'으로 불린 애니콜(SGH-T100)은 1000만대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 제품은 조약돌 모양의 디자인에 세계 최초 컬러 LCD(액정표시장치)를 탑재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2004년에는 네모난 박스 형태 일색이던 DLP 프로젝션 TV 시장에 T자형 L7 TV를 선보였다. 'IDEA 디자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은 이 제품을 계기로 삼성 TV는 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삼성은 '트렌드를 쫓지 말고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다양한 TV 라인업을 구축을 시도한다.
특히 사상 초유의 IMF와 금융 위기 속에서도 '인간'과 '기술'을 중심으로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서 이건희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경이로운 성장으로 삼성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시킨 것을 두고 일본 경제지 니케이는 2007년 "삼성은 한국인에게 일류를 상징하는 자긍심을 주고 있다"며 드라마틱한 성장을 이룩해 낸 삼성을 조명하기도 했다.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등 선대 회장 주도한 '황금기' 재현 숙제
현재의 삼성은 그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주도했던 '황금기'를 재현하기 힘들 것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연일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반도체, 모바일, 가전 등 대부분의 주력 사업에서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AI(인공지능) 시대 개화로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요가 대폭 늘었지만, 대응이 늦었던 삼성은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며 자존심을 구겼다. 한 발 앞서 HBM3(4세대) 시장을 선점한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보다 빨리 전사 흑자를 달성했고, 올해 1분기에는 1조 가까이 영업이익 격차를 벌렸다.
파운드리에서도 TSMC-삼성이었던 1강-1중 구도가 후발업체 인텔의 등장으로 1강-2중 구도로 바뀌었다. 추격자이던 삼성은 추격받는 입장도 됐다. 파운드리 2등에서 3등으로 뒤쳐질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삼성은 반도체 DS부문장 교체 카드를 꺼내들며 대대적인 쇄신을 예고했다.
모바일은 'AI폰' 주도권 경쟁에서 앞서나가고는 있으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작년 애플은 삼성전자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삼성으로서는 경쟁사를 웃도는 판매량으로 AI폰 시대 원년인 올해, 출하량 1위 타이틀을 되찾아야 한다. 가전도 경쟁사인 LG전자와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영업이익을 빠르게 좁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외부 상황이 따라준다면 좋겠지만 녹록하지 않다. 글로벌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지정학적 리스크 등이 맞물리면서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삼성그룹은 전체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주 6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경영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비상경영'에 나선 것이다. 주 6일제 근무 부활은 그만큼 삼성이 글로벌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재용, 복합 위기 대응 위한 '묘책' 마련 및 초격차 기술 진두지휘 전망
글로벌 대내외 환경이 기업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돌파구 마련이 어렵다고 하소연 할 수만은 없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1997년 IMF, 2009년 금융위기를 겪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도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저력이 있다.
이재용 회장으로서는 복합 위기 대응을 위한 '묘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초격차 기술 개발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2022년 회장 취임 이후 글로벌 유수의 기업들과 연달아 회동하는 한편 국내외 사업장을 바쁘게 오가며 적극적인 경영행보를 보이고 있다.
AI 생태계 확장에 힘입어 반도체, 인프라, 모바일 등 삼성의 수혜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는 있지만, 삼성이 보다 주도적인 입장에 서려면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정신이 선제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1세대 창업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포착한 기회를 사업화해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산업을 글로벌 선두로 이끌었다.
과감한 도전과 승부로 요약되는 선대 회장의 리더십을 계승해 이재용 회장이 반도체, 모바일 등 주력 사업 개선 등 현안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미래 삼성을 책임질 새로운 먹거리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적으로 반도체 부문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 지위 유지해 글로벌 1등을 이어가는 한편 팹리스(반도체 설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에서도 성과를 내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이동통신 분야에서도 5G(5세대)에 이어 6G를 선제 대비하는 데 보다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6G 선행기술 연구를 진행중이다. 배터리 사업도 미래 먹거리로 손꼽히는 전고체 배터리 성과에 주력할 전망이다. 차세대 게임체인저로 주목받는 전고체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 성과, 글로벌 투자 수순을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초격차 기술 개발과 더불어 미래 삼성을 책임질 차기 인수·합병(M&A)에서도 구체적 성과가 나올지 주목된다. 삼성이 타깃으로 삼을 분야는 로봇, 반도체, AI 등이 꼽힌다. 삼성전자는 최근 냉난방공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미국 기업 '레녹스(Lennox)'와 합작법인 설립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에는 로봇기업인 레인보우로보틱스에 전략적 지분 투자를 했고, 삼성의 전장·오디오 자회사인 하만은 음악 관리·검색·스트리밍 플랫폼 '룬'을 전격 인수했다. 이 외에 시장 잠재력 및 사업간 시너지가 확실시 되는 사업을 공략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회장은 지난해 11월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의혹' 결심공판에서 "사업 선택과 집중, 신사업, 신기술 투자, M&A를 통한 보완, 지배구조 투명화" 등을 언급하며 이재용식 '뉴삼성' 밑그림을 공개했다.
내부적으로는 기술 투자 및 지배구조를 강화를, 대외적으로는 인재 확보 및 신사업 기회 확대로 삼성 재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2016년 하만 이후 멈춘 대형 M&A도 가시화가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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