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린 낭만을 되찾고 싶다면
[장순심 기자]
▲ 영화 < 84번가의 연인 > 포스터 이미지 |
ⓒ 콜럼비아 픽처스 |
요즘 넷플릭스를 통해 보이는 영화의 세계는 마약과 폭력, 살인, 전쟁, 납치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영화의 세계가 보여주는 비정상이 과하고 억지스럽다가도, 이게 현실이라면 지구상에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대자연을 자랑하는 곳이 실상은 무법천지라는 사실에 OTT 채널에서의 영화 선택이 망설여질 때가 많다.
팬데믹 이후로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이 전부인 것 같다. 영화에 대한 갈증은 주로 유튜브에서 압축해서 소개하는 영상으로 해소하곤 한다. 그러나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영화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도 뒤적거리다 보면 천천히 제대로 음미하고 싶은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84번가의 연인'으로 번역된 영화 < 84 채링 크로스 로드 >(1986)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배우들의 명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좋다. 앤서니 홉킨스(프랭크 도엘), 앤 밴크로프트(헬렌 핸프), 주디 덴치(노라 도엘) 등. 밴크로프트의 실제 남편인 멜 브룩스가 제작한 영화로 1949년부터 1968년까지 핸프와 프랭크 도엘 사이에 오가는 편지글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영화는 미국 뉴욕에 사는 가난한 작가 헬렌 핸프로부터 시작된다. 토요문학지에 실린 광고에서 절판된 고전을 구할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영국 마크스 서점에 주문 편지를 쓴다. 이후로 20년간을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객과 직원 이상의 깊은 우정을 쌓아 간다.
전쟁이 끝난 직후 극심한 경제공황에 빠진 가난한 영국의 상황도 나온다. 헬렌은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지만 배급되는 적은 식량으로 생활하는 영국의 서점 직원들에게 통조림과 식료품 등 필요한 물품을 선물로 보낸다. 헨렌이 보내주는 선물은 서점 직원은 물론 그들 가족의 마음까지 풍성하게 한다.
▲ 영화 < 84번가의 연인 > 스틸 이미지 |
ⓒ 콜럼비아 픽처스 |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헬렌과 프랭크가 주고받는 편지의 내용은 책에 대한 편안하면서도 깊이 있는 대화의 표본 같다. 다양하고 방대한 책에 대한 지식과 담백하면서도 소박한 둘의 의견 교환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전쟁으로 인해 고서의 가치가 추락하고 상품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지만,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아끼는 둘의 모습에서 책은 책으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회복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책과 관련된 내용이 전부다. 그러나 다정한 연인들의 사랑의 대화처럼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영화에 나온 앤서니 홉킨스의 나이 50세, 앤 밴크로프트의 나이가 56세, 두 배우는 중년의 낭만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앤 밴크로프트의 소녀 같은 마음이 앤서니 홉킨스의 진중하면서도 순수한 마음과 하나가 되며 청춘의 로맨스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겨보았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또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먼젓번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 줘요.
- 프랭크"
오래된 책을 좋아하는 헬렌의 취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편지와, 헬렌을 위해 책을 준비하고 보내는 프랭크의 설렘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둘이 주고받는 것은 분명 고객과 직원의 편지임에도 마주 보고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대화처럼 달콤하다. 서로를 소중하게 대하는 정중함과 때론 발랄함이 느껴지는 언어의 세계, 새삼 글의 힘을 느끼게 된다.
"프랭크 도엘 씨.
봄날도 다가오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샐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와이엇이나 존슨 같은 시인으로 당신이 직접 판단해 주셨으면 해요. 그냥 아담한 책이면 되겠는데, 이왕이면 바지 주머니에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만큼 작은 책이면 더 좋겠고요. 그러니 멍하니 있지만 말고 뭔가를 좀 찾아보라고요!
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오늘 서적 우편으로 작은 책을 한 권 부쳤습니다. 부디 핸프양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한 권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글쎄요. 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 마크 서점, 프랭크 도엘"
마지막으로 영화 전반을 채우는 타이프라이터의 소리가 작품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경쾌하게 이어지는 타자 소리와 헬렌의 목소리와 하나가 되면 근사한 울림이 완성된다. 지금처럼 가볍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손가락의 단단한 힘이 활자를 때리고 글자로 새겨지는 과정은 꾹꾹 눌러쓰는 편지만큼이나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그러다 행을 바꾸며 타이프라이터가 이동하면 타자기는 더 이상 장식이나 소품이 아닌 영화의 중요한 배역이 된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민생은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 왠지 낭만은 사치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중년과 노년은 낭만을 억지로라도 지워야 하는 상황인 것은 아닐까. 혼란스럽고 어렵던 영국과 미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 둘의 편지에서처럼, 우리도 책을 얘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 봐온 아끼던 시집을 함께 건넨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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