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인' 정부, 학교가 위태롭다
[서부원 기자]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진학할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설득해 주세요."
몇 해 전 자녀의 진학 상담차 학교를 찾아온 한 학부모의 신신당부는 이랬다. 역사 공부의 재미에 빠져 있던 아이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진로를 정한 터였다. 부모의 반대는 심했고, 결국 담임교사를 찾아와 '철딱서니 없는' 아이의 선택에 하소연을 늘어놓은 것이다.
반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 사학과를 졸업해서는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는 거였다. 어차피 흥미나 적성은 나이가 들면서 바뀌는 게 다반사라며, 취업이 힘든 전공을 선택하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했다. 사학과나 철학과 등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집에서나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이마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실용 학문으로 비교적 취업이 용이하다고 여겨졌던 상경 계열조차 수험생들의 선택지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럴진대, '문사철'로 통칭해 온 인문학은 아예 거들떠보지조차 않는 전공으로 전락했다. 과거 '수포자들의 수용소'라는 멸칭조차 부러운 시절이 됐다.
얼마 전 고1 수업 시간에 각자의 희망 진로에 관해 미리 물어본 적이 있다. 고1의 2학기에 고2, 고3 때 배워야 할 선택 과목을 정해야 한다. 지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시행되면서 문과와 이과 구분이 공식 폐지되었지만, 대학 전공별로 '이수 권장 과목'을 설정해 놓고 있어 단지 수능에서만 유효할 뿐 실제 교육과정 운영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4 : 22. 문과 계열로 진학하겠다는 아이가 한 반에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해가 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데, 숫제 '0'으로 수렴할 기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마저 흥미와 적성을 고려해 선택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상 넷 모두가 수학 공부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문과로 간다는 경우였다.
흥미와 적성은커녕 아무런 의지도 열정도 없이 선택한 대학의 전공 공부가 즐거울 리 없다. 전통적으로 선호되던 경영학과와 경제학과조차 '문송합니다'며 고개를 숙이는 상황에서 이미 인문학은 싹부터 잘린 셈이다. 듣자니까, 대학 내 인문 사회 계열 학과 재학생 중 복수 전공을 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대학에 진학한 제자 중엔 상위권 대학으로 '승급'하기 위해 다시 수능에 도전하는 아이도 있지만, 전공을 갈아타기 위해 '반수'를 기꺼이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전공에 대한 비전도 애정도 없다고 선선히 말한다. 당장 점수에 맞추다 보니 '억지 춘양'식으로 지원했다는 거다.
"대학에 인문, 사회계열 전공 구분은 무의미하고, 이공계열도 이른바 '계약학과' 아니면 도토리 키재기이며, '의치한약'만 제 홀로 우뚝한 모습입니다. '의치한약'을 꿈조차 꿀 수 없는 절대다수 수험생에게 남은 거라곤 학벌 서열의 상위권 대학 '간판'뿐이죠."
▲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와 전국사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가 24일 교육부의 무전공 입학생 확대 방침이 기초학문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며 추진 중단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인문대에서 강창우 서울대 인문대학장 겸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 협의회장이 입장문을 읽고 있다. 2024.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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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지금도 웬만한 상위권 대학마다 개설된 자유전공학부의 '시즌 2'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자유전공학부는 대학 진학 후 실질적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여 전공 선택권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지난 2010년부터 운영된 제도다. 통섭 교과와 융합형 인재 양성 등이 교육의 화두로 떠오르며 빠르게 확산됐다.
실제로도 이름만 바뀌었을 뿐, 무전공과 자유전공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금껏 신입생 모집 정원의 10%에도 훨씬 못 미쳤던 무전공 선발 인원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건, 기존의 자유전공학부 운영에 대해 정부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전가의 보도처럼 전공의 장벽이 허물어져야 미래를 선도할 인재가 양성될 수 있다고 부르댈 뿐이다.
듣자니까, 일부에선 아예 대학 내 전공을 구분하지 말고 전체를 무전공으로 선발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운영하고 있으며, 급변하는 미래 사회를 위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강조한다. 무전공 선발의 확대야말로 교육개혁을 위한 첫 단추라고 단언하는 이들도 있다.
이른바 '교육 선진국의 해바라기'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우리의 남루한 교육 현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통계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만, 무전공 선발의 확대는 특정 학과 쏠림 현상이 필연적이다. 취업률이 낮은 비인기 학과는 통합되거나 폐지되는 운명을 맞았다. 지금 우리는 인문학이 퇴출되고,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의 민낯을 목도하고 있다.
자유전공학부라고 쓰고 '로스쿨 대비반'이라고 읽는다는 볼멘소리마저 들린다. 이러다 끝내 대학에서 살아남을 전공은 단 둘뿐이라고 말한다. 문과 계열에선 로스쿨, 이과 계열에선 '의치한약'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이를 조선시대 '반상제'에 비유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둘만 '양반'이고, 나머지는 모두 '상놈'이라는 자괴감의 발로다.
현직 고등학교 교사로서 가장 어이없는 건, 정부의 무전공 선발 확대 방침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숫제 '이렇게 뽑을 테니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식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대입에 철저히 종속된 현실에서, 대학이 '갑'이고, 고등학교가 '을'이라는 걸 정부가 공인한 셈이다.
당장 현행 교육과정과 대입 전형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조차 없는 듯하다. 그러잖아도 지금 학교는 '좌회전 깜빡이 넣고 우회전하라'는 교육과정의 변화에 몸살을 앓고 있다. 수능의 막강한 영향력은 그대로 둔 채, 내년에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다. 말 그대로, '동그란 네모'를 그리라는 거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전공 선발 확대에 대비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현행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대학마다 가장 중시하는 평가 기준이 이른바 '전공 적합성'이다. 수험생의 적성과 역량이 전공 공부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겠다는 취지다. 무전공 선발이라면 아예 평가 기준조차 될 수 없는 항목이다. 진학 지도 교사들 사이에서는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과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을 다시 써야 하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과목이 세분화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손볼 생각은 하지 않고, 통섭과 융합 운운하며 대학 전공의 벽을 허물자는 정부의 '즉흥성'이 놀랍다. 중고등학생 시절 진로 탐색의 기회를 넓힌다며 시행된 '자유학기제'와 '자유학년제'에 대한 평가와 환류 작업은 온데간데없는데, 무전공 확대로 대학 신입생에게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 자체가 황당하다.
교대와 사범대의 교사 양성 과정과 초중고 교육과정, 대입과 대학의 학과 운영 등은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톱니바퀴와도 같다. 그만큼 교육 정책은 치밀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중장기적 계획은커녕 뻔히 보이는 부작용에 대한 대책도 없이 '묻고 더블로 가는' 정부의 막무가내 교육 정책이 불안불안한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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