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이 이승만의 공적? 극우 세력의 괴이한 결론 [전강수의 경세제민]
[전강수 기자]
▲ 영화 <건국전쟁>에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등장하는 장면은 2023년 7월 대한상의 제주포럼 강연이다. 해당 강연에서 한 전 장관은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대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게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다른 나라였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
ⓒ 법무부 유튜브 갈무리 |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참 기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상 방식이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대표적 자산가였던 지주들의 땅을 강제로 몰수해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분배한 엄청난 개혁을 보수 인사들이 나서서 지지하니 말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토지와 부동산은 대표적인 자산이고 그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최대 질곡이라 일컬어지는 불평등과 양극화는 여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만일 어떤 정치세력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년대 농지개혁 방식으로 토지와 부동산을 유상몰수·유상분배하겠다고 한다면, 농지개혁을 상찬하던 인사들은 태도를 바꾸어 사생결단 반대할 것이다.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 꼽히는 정규재는 지금 보수세력이 농지개혁을 상찬하는 데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농지개혁을 '좌익적 대안'이라고 단정하고 한국의 보수세력이 그런 정책을 상찬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하여간 정규재는 일관성이라도 있다.
극우 인사들이 농지개혁 띄우는 이유
극우 인사들은 왜 좌익적 대안이라고까지 매도당하는 농지개혁을 애써 띄우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서다.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뉴라이트 세력이 '이승만 띄우기' 작전을 벌이기 전만 해도, 이승만은 단지 4.19혁명으로 쫓겨나 하와이에서 인생을 마감한 독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민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사실 이런 부정적 인식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대통령 탄핵을 당할 정도로 독립운동가로서 자격 미달이었으며, 미국조차 생각지 않고 있던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해 남북 분단을 초래했고, 해방정국과 6.25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양민학살에도 책임이 있었다.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조직된 반민특위를 해산하는 대신, 거꾸로 친일파를 중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수많은 애국 시민들을 고문·살해하는 것을 방치·조장하기도 했다. 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부정을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집권 연장을 목적으로 한 개헌도 두 차례나 감행해 민주주의를 파괴하기도 했다. 4.19혁명 당시 꽃다운 청년들에게 발포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책임도 결국 이승만에게 있었다. 12년을 집권하는 동안 경제정책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으니 195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이 지체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승만에게는 그저 미국에서 들어오는 경제원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였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승만이라는 정치인이 대한민국에 하나라도 유익을 끼친 일이 있는지 찾아보기 마련이다. 그렇게 추적해보면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기가 어렵고, 겨우 눈에 띄는 것이 농지개혁임을 알게 된다. 요즘 극우 인사들이 농지개혁을 상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림 1] 1960년 무렵 토지소유 평등도와 1960~2000년간 경제성장의 상관관계 전 세계 26개국을 대상으로 1960년 무렵의 토지분배 상태를 지니계수로 추산하여 가로축에 표시하고, 각 나라의 1960~2000년 장기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세로축에 표시한 것(원 출처: Deininger, 2003, Land Policies for Growth and Poverty Reduction, World Bank Policy Research Report, p.18). |
ⓒ 여문책 |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개혁이 철저하지 못해서 기존 지주층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고, 지주-소작 관계도 온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실증연구가 심화하면서 농지개혁은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영농 중심의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고도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음이 드러났다. 외국에서도 이 새로운 견해가 사실이었음을 논증하는 연구들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그림 1'이다. 이 그림은 전 세계 26개국을 대상으로, 1960년 무렵의 토지분배 상태를 지니계수로 추산하여 가로축에 표시하고, 각 나라의 1960~2000년 장기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세로축에 표시한 것이다. 1960년 무렵 한국의 토지분배 지니계수는 0.3을 약간 초과하는 수준으로, 분석 대상 26개국 가운데 토지분배가 가장 평등했음을 말해준다. 대만과 일본의 토지분배도 상당히 평등했는데, 그것은 두 나라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단행한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유사한 농지개혁에 성공한 세 나라가 공통적으로 높은 장기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좌하 쪽에 토지독점이 심각했음에도 토지개혁에 실패한 중남미 국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니계수가 0.9에 달해 토지분배가 극도로 불평등했던 이들 중남미 국가의 장기 경제성장률은 극히 낮았다. 그렇다면 1960년 무렵 각 나라의 토지분배 상태와 그 후의 장기 경제성장률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농지개혁에 관한 실증연구들은 농지개혁으로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교육이 발전해 우수 노동력이 대거 양성되었으며, 신흥 자본가의 출현이 촉진되었음을 입증했다. 특히 유종성 교수에 따르면 농지개혁은 일거에 자산과 소득의 평등성을 실현해 외국 학계가 주목하는 '공평한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았다.
이처럼 농지개혁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것이 이승만 치하에서 이뤄졌음을 새삼 자각하면서 뉴라이트들은 농지개혁을 이승만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그것이 자가당착적인 결정이었음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극우 세력이 자기 발등을 찍는 괴이한 결론을 유포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한 가지 짚어 봐야 할 일이 있다. 과연 농지개혁의 시행을 이승만의 공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당시 대통령이 이승만이었으니 농지개혁 성공의 공을 오로지 이승만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몫은 국정 최고책임자에게 응당 돌아가는 '형식적인 공로'에 불과하다고 볼 만한 사실과 정황이 존재한다.
▲ 영화 <건국전쟁>의 한 장면 |
ⓒ 다큐스토리프로덕션 |
첫째, 당시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의 시행을 거부하기 어렵게 만드는 외부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압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미국은 남한을 반공의 보루로 여겼고, 그래서 남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하지 못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해 그들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미국은 미 군정기에 귀속농지를 불하하여 농지개혁의 흐름을 불가역적으로 만들었으며, 한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각종 채널을 통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요컨대 농지개혁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일환이었고, 이승만은 거기에 충실히 부응했다. 이런 시각에서만 본다면, 농지개혁 시행의 실질적인 공로는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에 돌아가야 맞다.
북한으로부터의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은 1946년 3월 한 달 만에 무상몰수·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 정부가 농지개혁을 실시하지 않으면 남한 농민들의 마음이 북한과 공산주의 쪽으로 쏠릴 위험성이 있었다. 미국의 강한 압박이 존재하는 가운데 북한이 이미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으니 이승만에게는 다른 선택이 존재할 수 없었다.
둘째,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신생 독립국의 장기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한 정략의 도구로 취급했다. 당시 지주들이 집결한 한민당(민국당)과 대결 구도에 놓여 있던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할 사회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다수의 농민은 이미 북한이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남한 농민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농지를 분배하는 수밖에 없다고 이승만은 생각했다.
요컨대 "이승만에게 농민은 포섭과 장악의 대상이었지, 존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농민 유인 전략 중 하나로 농지개혁을 서둘렀지 진정으로 농민을 위한 개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김일영, 2006, 303쪽) 공산주의자였고 여전히 혁신적 입장을 가졌던 조봉암을 이승만이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봐야 이유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48년 8월 4일 자로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미국 시러큐스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42~1960년 이승만의 정치고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봉암을 임명한 목적을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0월에 농지개혁 1년 연기를 결정했다가 미국 측의 강한 반대에 직면하여 며칠 만에 철회한 적도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승만의 연기 결정이 농지개혁을 지연·폐기하려는 지주층의 압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고했다(정병준, 2003, 137쪽). 요컨대 이승만은 애초부터 정치공학 차원에서 농지개혁 문제에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흐지부지 중단해 버릴 생각까지 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농지개혁의 실질적 공로를 돌릴 수 있겠는가?
실질적인 공로자들 : 조봉암, 강정택, 강진국
▲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조봉암 |
ⓒ 위키미디어 공용 |
조봉암의 인품과 실력, 활약상은 많이 알려졌지만, 그와 함께 농지개혁안을 마련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강정택과 강진국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강정택은 대구고보(현 경북중·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어려웠던 제일고, 도쿄제대를 졸업한 천재였다. 가난했던 그가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그 손자 시부사와 게이조의 후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두 사람은 모두 일본 재계의 거물이었다. 특히 시부사와 게이조는 전전에는 도쿄저축은행 회장, 경성전기 대표, 일본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으며, 전후에는 초대 대장성 대신을 맡아서 재벌개혁을 주도했다).
강정택은 1930년에 도쿄제대 농학부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결정에는 가난한 조국의 농촌을 살려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33년 도쿄제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바로 같은 학과 부수(副手)로 임명되어 연구를 계속했고 1939년에는 마침내 조수로 임명되었다(당시 일본 대학 조수란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전임 교수). 그는 부수 시절인 1935~1939년 자신의 고향인 울산 달리를 중심으로 행해진 농촌 위생 조사와 농촌생활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43년 3월 도쿄제대 조수직을 사임한 이후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그때도 도쿄제대의 발령으로 3년간 '조선 농촌 경제사정에 관한 사항 조사' 프로젝트를 위탁받아 진행했다.
해방 후 강정택은 경성제대가 이름을 바꾼 서울대학교의 법문학부 경제학과 교수(농업정책 담당)로 임용되었다. '국대안 파동' 때문에 경제학과 교수 6명이 함께 퇴진하고 학과가 폐지되는 바람에 강정택의 서울대 교수직은 반년여 만에 끝이 났지만, 그가 당시 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농지개혁을 준비하던 시기에 한국의 농촌 현실에 대해 강정택만큼 밝은 사람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한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농업문제연구위원회 총책임위원을 맡기도 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합작 7원칙'을 마련할 때 토지개혁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강정택의 비범함을 알고 있던 조봉암은 한 달도 안 된 남봉순 차관서리를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강정택을 앉혀 농지개혁을 지휘하도록 했다. 처음 조봉암의 요청을 받았을 때 강정택은 강하게 고사하며 고향 울산으로 피신해버렸지만, 조봉암은 삼고초려 끝에 겨우 그를 농림부 차관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농지국장 강진국은 어떤 사람일까? 강진국은 부산 동래 출생으로 일본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의 농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투신했다. 1930년대에 사회개량주의 입장의 농촌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중간파 노선을 취했던 조선산업건설협의회에서 주요 실무를 담당했으며, 입법의원 산업노동위원회 산하 조선산업재건협회에서 상무를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유상매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중간파의 대안을 숙지하고 있었다.
강진국은 농지국장에 임명된 후 농지개혁 준비 작업으로 무려 두 달 동안 직접 농촌 현지를 돌며 농촌 상황을 파악하고 농민들의 여론을 청취했다. 이런 고된 작업을 거친 다음 강진국은 1949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세 과장과 함께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농지개혁법 초안을 만들었고, 그것을 다시 강정택 차관과 이틀 동안 재검토·수정했다.
농지개혁법 초안의 특징
1950년 2월에 최종 통과되는 농지개혁법의 초안(농림부안)은 강정택과 강진국의 주도 아래 작성되었다. 농림부안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농지의 몰수를 매수가 아니라 '징수'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농지를 제값을 주고 매수하지도, 무상으로 몰수하지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과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중간 입장을 채택한 것이다.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은 제3의 방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둘째, 지주 보상액을 평년작 생산량의 150%(3년 거치 후 10년간 균분 보상)로 규정했다. 지주 보상액 수준의 결정은 농지개혁법 제정 과정에서 최대의 논란거리였다. 지주세력은 보상액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농민의 이해를 대변했던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은 이를 낮추기 위해 애를 썼다. 최종적으로 농지개혁법 개정 법률에서 확정된 지주 보상액은 농림부안과 동일한 150%였다. 지주세력이 포진하고 있던 국회 산업위원회는 처음 국회안을 만들 때는 지주 보상액을 300%로, 그리고 나중에 개정 법률안을 만들 때는 240%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주들의 이런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지주 보상액의 수준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혁신적 성향을 가진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의 활약 덕분이기도 했지만,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이 만든 농림부안이 강력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지 가격이 일제 강점기에는 평년작 생산량의 500% 정도, 해방 후에는 300% 정도였음에 비추어, 평년작 생산량의 150%라는 수준은 보상 가격으로는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토지를 지주로부터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토지개혁에서 최대 난제는 토지 확보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은 이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셋째, 농민의 지가 상환액은 더 낮추어서 120%(매년 20%씩 6년간 상환)로 하고 상환 기간 중에는 국세 등을 면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다. 이 120% 조항은 1949년 6월 공포된 농지개혁법에서는 125%로 조정되었다가, 정부 재정 부담을 이유로 농지개혁법 개정 법률에서 150%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리고 상환 기간 중에 국세 등을 면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던 조항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에 의해 제안되었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위에서 확인되는 농림부안의 친농민적·반지주적 성격은 실제 법률의 제정 과정에서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핵심은 살아남았고, 그 덕분에 단기간에 '대지주의 나라'를 '소농의 나라'로 변모시키는 엄청난 개혁이 저렴한 사회적 비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를 내게 되는 농지개혁법의 성립에는 조봉암의 확고한 의지(그는 농림부장관을 그만둔 후에도 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지주층의 방해를 막아내고 제대로 된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와 강정택·강진국의 뛰어난 현실인식·경험·능력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할 것은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의 주역 조봉암을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조봉암의 엄청난 기여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악행이었다(조봉암 사건에 대해서는 2011년 대법원 재심이 이뤄져서, 52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니 어떻게 농지개혁의 실질적인 공로를 이승만에게 돌릴 수가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다음의 문헌을 참고해 작성했다. 칼럼의 특성상 직접 인용 외에는 주를 붙이지 않았다. 김삼웅, 2020, <이승만 평전>, 두레. 김일영, 2006,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박지향 외 엮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책세상. 방기중, 2001, “농지개혁의 사상 전통과 농정 이념”, 홍성찬 편, <농지개혁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유종성, 2016,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 동아시아. 이문웅, 2008, ““강정택 선생의 생애와 학문 세계”,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업경제>, YBMsisa. 이정우, “이승만 기념관을 반대함”, <영남일보> 2023. 11. 21. 전강수, 2019, <부동산공화국 경제사>, 여문책. 정병준, 2003, “한국 농지개혁 재검토”, <역사비평> 65. 이 글은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의 [SIES 이슈와 정책] 71호로 발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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