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구하라, 그리고 추적단 불꽃

양성희 2024. 6. 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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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요즘 들어 두 젊은 여성 생각을 많이 한다. 한쪽에게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다른 한쪽에게는 감사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많다. 헤어지려는 남자친구로부터 성관계 동영상 공개 협박을 받다가 세상을 등진 가수 고 구하라, 그리고 일명 ‘서울대 n번방’ 사건을 밝혀낸 추척단 불꽃의 활동가 겸 온라인 저널리스트 원은지씨 얘기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엘리베이터 CCTV 속,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기 아이돌이 동영상 공개 협박을 하는 남자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던 장면. 구씨 이름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파장을 불러일으킨 BBC 버닝썬 다큐 때문이다. 다큐는 가수 정준영의 불법촬영 범죄와 버닝썬 사건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드러냈다. 특히 승리 일당과 경찰의 유착 관계를 밝히는 데 구하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최초 보도했다. 승리 단톡방 멤버인 가수 최종훈을 설득해 경찰 간부가 누군지 말하게 한 것이 바로 구하라였다는 것이다. 이런 다큐가 한국 언론이 아니라 해외 매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부끄럽기도 하다. 해외 반응은 ‘K팝 스타들의 악질적 성범죄, 처벌 수위가 이렇게 낮다니 놀랍다’ 일색이다.

「 경찰 대신 ‘서울대 n번방’ 파헤쳐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 맞서
신분 위장 수사 범위 더 확대해야

지난 19일 공개된 BBC뉴스코리아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하라의 도움으로 버닝썬 게이트 핵심 인물 '경찰총장'의 존재에 대해 취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유튜브채널 BBC뉴스코리아 캡처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도 구씨의 비극은 계속됐다. 어린 구씨 남매를 버리고 연락 한 번 없던 친모가 갑자기 나타나 거액을 상속하면서, 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한 친부모가 자녀 유산을 상속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구하라법’ 제정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 또한 유야무야됐다. 살아서 불법촬영물 피해자였고, 죽어서도 부조리한 세상사에 원통했을 그녀다.

서울대에서 피해자가 최소 61명에 달하는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했다. 이들은 서울대 동문으로, 텔레그램을 통해 여성들의 졸업사진, SNS 사진 등을 토대로 불법 합성물을 제작하면서 변태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유포하는 식으로 범행해 'n번방' 사건을 연상케 한다. 뉴스1

원은지씨가 파헤친 ‘서울대 n번방’ 사건은 서울대 출신 두 남성이 동문 후배 여학생을 포함해 61명 여성의 얼굴에 음란 영상을 합성해 유포한 딥페이크 성범죄다. 돈도 아니고 그저 성적 만족을 위해 ‘지인 능욕’ 딥페이크 허위 영상을 돌려봤고, 피해 여성들에게 영상을 전송하는 과감함도 보였다. 당황해하는 여성의 반응마저 즐기는 변태적 욕망이자, 텔레그램이니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무려 4차례 수사에도 성과 없이 수사가 중단되자 피해자들이 원씨를 찾았다. 여러 피해자가 공통으로 아는 ‘지인’을 지목한 후, 신분을 위장한 원씨가 그에게 접근해 2년여 친분을 쌓고, 오프라인으로 끌어내 덜미를 잡은 것이다. 반드시 죗값을 묻겠다는 피해자들의 의지와 원씨의 잠입취재 노하우가 만나 만든 성과다.

원씨는 2020년 세상을 흔든 ‘n번방’ 사건에 이어 이번 ‘서울대 n번방’ 사건까지 20대 여성의 몸으로 수사기관도 못 한 일을 두 번이나 해냈다. 원씨는 n번방 관련 다큐에 출연해 잠입취재 과정에서 무수한 성착취 영상에 노출된 트라우마에 오래 시달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는데, 수사기관이 손놓고 있는 가운데 원씨 개인이 오롯이 짊어진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원래 여성 2인조였던 추적단 불꽃은 그중 박지현씨가 지난 대선 때 민주당 비대위원장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원씨 1인 체제가 됐다.

딥페이크 불법촬영 범죄는 기술의 발달로 날로 손쉽고 정교해지고, n번방과 같은 실질적인 성착취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피해자에게는 인격이 무너지는 끔찍한 범죄다. 원씨는 가능한 일을 경찰은 왜 못 했을까. 사건 이후 경찰은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범죄에만 허용된 신분위장 함정수사의 범위를 성인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21년 미성년 상대 디지털 성범죄에 위장수사가 도입된 후 2년여간 경찰은 1000명 넘게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과도한 기본권 침해 논란도 있지만,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을 앞설 수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도 관련 법 개정 논의가 있었으나 국회를 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국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거야 주도 ‘특검 정국’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킬 게 빤해 보이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하는 22대 국회를 기대해 본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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