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이코노믹스] 한·일 FTA 우선 추진해 전략 공간 확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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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안보 시대, 한일중 FTA 가능할까
미·중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주도
한·일·중 정상회의가 개점휴업 상태이던 지난 5년 동안 국제 통상 환경은 지각변동을 겪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가격과 속도로 소재와 부품을 확보해서 가장 싼 비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곳에서 최종 조립·생산하게 설계됐던 글로벌 공급망은 분절화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마스크 대란의 경험은 비용 최소화를 지고지선의 가치로 신봉하던 글로벌 공급망의 치명적 취약성을 노출했다. 원천 기술만 가지고 있으면 최소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다른 국가에 공장을 세워야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세계화 시대의 경영 방식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국이 통제할 수 있는 영토 안에서 공장을 가동하는 것이 새로운 생존 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제적 효율성 대신 정치적 통제가 국가 경영의 새로운 문법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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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만에 만난 한·일·중 정상
“3국 FTA 협상 논의 지속” 선언
공급망 분절과 무역 무기화 속
‘신산업 정책’에 다자체제 붕괴
한·중 FTA 수준 낮아 한계 명확
일본과 포괄적 FTA를 대안으로
」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시작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어받은 미국의 중국 기술 굴기 견제는 공급망 분절화를 주도하는 요인이다.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의약품, 희소 광물 등 첨단 산업 분야이면서 안보와 깊숙하게 연계된 분야의 중국 의존도를 줄여야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은 극도로 분열된 미국 정치에서 유일한 합의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해 다시 백악관의 주인으로 복귀하든, 바이든이 재선에 성공한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되든, 미국의 중국 견제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공급망 분절화는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해 설계됐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시작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반도체 산업의 미국 회귀’가 진행되고 있다. 임금과 에너지 요금, 운송 인프라 등에서 경쟁 열위에 처한 미국에 반도체 공장이 하나, 둘 세워진다는 것은 공상과학(SF)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엄청난 규모의 보조금으로 자국 내에 투자를 유치하려는 ‘신산업 정책’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이 먼저 시작했고, 유럽연합(EU)과 일본이 망설임 없이 뒤따랐다. 반도체 산업의 최강자로 등극한 대만의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고, 일본 구마모토에 공장을 완공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에 축구장 800개 규모의 공장 용지를 확보하고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첨단 산업의 자국 기업 키우기의 원조는 중국이다. ‘중국 제조 2025’가 세계무역기구(WTO)에 반한다면서 맹비난하던 미국과 EU, 일본이 아니던가. WTO 다자체제의 핵심 대주주이던 그들이 스스로 다자체제를 허물고 있다.
20세기 후반, 신생 독립국이 보조금에 기대 국내 산업을 성장시키려던 산업 정책을 비효율적인 정치 게임으로 낙인찍었던 선진국 엘리트는 21세기 자신의 신산업 정책은 경제 안보 확보를 위한 전략 게임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그들의 후안무치를 내로남불로 비난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국의 이익 앞에 기존에 합의했던 국제 질서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산업 정책의 보조금을 WTO 위반으로 제소해도 그 심리를 진행할 법정이 열릴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2001년 시작한 WTO의 첫 번째 다자무역 자유화 협상이던 도하 어젠다(DDA)는 20년을 넘긴 현재까지 타결되지 못하고 있다. WTO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망가지게 된 이면에는 경제 대국의 자국중심주의 때문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한·일·중 정상이 “WTO를 중심으로 한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이고 비차별적이며 규칙에 기반을 둔 다자 무역체제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한다”고 선언한 것은 비현실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실리론으로 다자체제 위기 극복해야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선 대한민국이 지금까지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다자체제의 식물화 위기를 극복하려면, 명분론에 집착하지 말고 냉정한 현실 인식을 앞세운 실리론을 전면에 둬야 한다. 한국이 서둘러 타결했던 한·중 FTA의 경우를 돌이켜 보자.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과 EU를 상대로 각각 포괄적이고 수준 높은 FTA를 체결했던 한국은 정작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던 중국과 FTA 협상을 추진하면서 놀랍게도 포괄적, 수준 높은 FTA 추진을 스스로 포기했다. 중국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면 한국 농업이 궤멸한다는 반발과 저항에 위축됐다. 수입 농산물로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히고, 안전성 심사 강화로 식품 주권을 지켜내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국 및 EU와 FTA를 체결한 유일한 제조업 강국이라는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중국 시장 진출의 지렛대로 활용하기는커녕, 중국의 ‘만만디’ 전략에 끌려다녔다. 한국의 비교우위가 돋보이는 서비스와 투자 분야 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되자, 조급해진 한국은 상품 분야 위주의 제한적 무역 자유화만을 담은 협정을 서둘러 타결했다. 서비스와 투자는 후속 협상(2단계)의 과제로 넘겼다. 한·중 FTA가 ‘수준 미달의 미완성’이란 힐난을 받아도 변명하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10년이 세월이 흐른 지금, 2단계 협상은 진전 없이 겉돌고 있다. 중국은 무성의·무관심으로 다시 ‘만만디’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투자 유치 때 받았던 중국의 약속과 달리 새로운 규제에 손발이 묶이면서 투자 손실이 이어지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은 FTA 체결 상대국에 무역 보복도 서슴지 않았다. 서둘러 FTA를 체결하면서까지 한국은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 역할을 해 주길 기대했지만 기대는 빗나가고 북핵 위협은 가중돼 갔다. 북핵 위협에 한국이 자위 방위책으로 도입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설치에 중국은 무역 보복을 가했다. FTA는 무용지물이었다.
한·일·중 FTA, 지금으로선 공염불
‘말이 아닌 행동을 보라’는 명제는 국제 관계를 성찰하는 근본이다. 다자 무역체제를 지키려는 의지, 개혁과 개방에 대한 중국의 의지가 퇴보한 지금, ‘포괄적, 높은 수준’의 한·일·중 FTA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설령 천신만고 끝에 ‘포괄적, 수준 높은’ FTA를 만들어 내더라도 그것은 호혜적이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을 위험이 크다. 무역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수단이 아닌, ‘내가 살기 위해 너를 해치려는’ 무기로 둔갑할 수 있는 위험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무역의 무기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체제가 다른 국가끼리 무역과 투자가 활발해질수록, 국경을 넘나드는 상품과 돈과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국가 간 분쟁이 줄어든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무역이 ‘평화로 가는 길’을 낸다는 믿음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이념적·철학적 근간이 아니었던가. 그 믿음과 가르침은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21세기 패권 다툼을 하면서 퇴색했다. 무역 의존도가 심화할수록 상대 국가의 무기화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은 일본과 동중국해 영토 분쟁이 발생하자 희토류의 일본 수출을 금지했다. 전자 제품과 의료기기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 희토류였다. 사드 설치를 이유로 중국은 단체 한국 관광을 중단했고, 한류가 중국에서 된서리를 맞았다.
핵심 소재 공급망 안전성 확보 필수
경제 안보 시대에 핵심 소재의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고 ‘무역의 무기화’를 방지하는 전략에 지혜를 모으고, 단호한 결기로 대처해야 미래를 열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방치됐던 한·일 FTA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주요 무역 상대국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과는 양자 FTA를 체결하지 못했다. 2004년 협상 중단 이후 협상 재개의 시도는 있었지만, 한·일 FTA의 필요성에 대한 비전과 전략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부족했다. 무역 자유화에 수세적이던 일본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통상 정책으로 전환했다. 중국의 비시장 경제 체제가 세계 경제에 초래하는 구조적·행태적 문제와 도전에 정면으로 대처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럼프가 미국을 TPP에서 탈퇴시켰지만, 일본은 나머지 협상 참여국과 함께 협정을 지켜냈다. 그렇게 살아남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무역의 무기화 시대에 한국이 고려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지였다. 한국의 CPTPP 참여에 대한 논의는 무성했지만, 다음 단계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미국 없는 CPTPP 참가의 실리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있다.
그러하다면 한·일 FTA를 추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경제 안보 시대에 자유 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시대적 파고를 헤쳐갈 수 있는 전략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당장 가능하지 않은 한·일·중 FTA는 미루고 ‘포괄적, 수준 높은’ 한·일 FTA 추진을 우선순위에 둘 것을 제안한다. 지금 중요한 것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동아시아의 미래를 바꿀 만한 ‘포괄적, 수준 높은’ 한·일·중 FTA를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언젠가는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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