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보다 '일잘러' 공무원이 더 위험" 오스카 거머쥔 나치 풍자 영화

나원정 2024. 6. 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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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개봉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유대계 영국 감독의 나치 독일 초상
악마화 대신 '악의 평범성' 부각해
칸 심사위원대상·오스카 국제장편상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담장 밖, 꽃으로 만발한 독일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 부부의 그림 같은 일상으로 역사의 잔혹한 진실을 그린다. 사진 TCO(주)더콘텐츠온

“괴물은 존재하지만 그 수가 적다. 더 위험한 건 질문 없이 (시키는 대로) 믿고 행동할 준비가 돼있는 평범한 사람, 공무원이다.”
유대계 이탈리아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10개월을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1958)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5일 개봉)는 이런 ‘악의 평범성’을 소름끼치게 그려낸 작품이다. 라디오헤드‧자미로콰이 등의 뮤직비디오, 광고, 영화를 넘나든 유대계 영국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59)가 ‘언더 더 스킨’(2014)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올초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음향상 등을 휩쓸었다.
다섯 자녀를 둔 젊은 가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폴란드의 천상의 화원 같은 아름다운 사택에서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를 여왕처럼 받들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복무한다.


나치 부부 꿈의 왕국 이웃엔 400만 학살 아우슈비츠


그런데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회스가의 담장 너머는 당시 400만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이고, 루돌프는 바로 이 악명 높은 수용소의 소장인 독일 나치 장교다. 나치는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40㎢ 지역을 '존 오브 인터레스트'(관심 지역)로 불렀다.
영국 작가 마틴 에이스미스의 2014년 동명 소설에서 착안한 영화는 더 효율적인 유대인 ‘소각 시스템’을 고민했던 루돌프를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워커홀릭(일 중독자)으로,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불리는 헤트비히를 결혼생활에 성공한 노동자 계급의 딸로 묘사했다. 가해자를 악마화한 여느 홀로코스트 작품들과 반대로,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잘 살려고 애쓰는 한 가족의 초상을 그렸다. ‘우리와 다른 인간들’로 손쉽게 선 그어온 역사 속 악당들이 우리와 닮은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단란한 가족의 평온한 일상은 구역질 치미는 공포 장면이 된다.
‘쉰들러 리스트’(1993) 이후 유일하게 아우슈비츠 현지 촬영을 허가받고, 독일 명배우 크리스티안 프리델, 산드라 휠러가 처음으로 나치 역할을 수락한 이유다.

배우 연기, 10여대 카메라로 '관찰예능'처럼 촬영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담장 밖, 꽃으로 만발한 독일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 부부의 그림 같은 일상으로 역사의 잔혹한 진실을 그린다. 사진 TCO(주)더콘텐츠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보여주지 않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뚜렷하게 화면을 잠식한다. 루돌프가 한가롭게 태우는 시가 담배 연기 너머로 아우슈비츠의 거대한 굴뚝이 쉴 새 없이 연기를 뿜어낸다. 아이들이 나들이 간 강물엔 소각장에서 흘러나온 잿가루가 떠내려온다.
헤트비히는 집에 찾아온 어머니에게 “유대인은 벽 반대편에 있다”고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하지만,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값비싼 보석과 밍크 코트, 심지어 쓰고 남은 고급 립스틱까지 챙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담장 밖, 꽃으로 만발한 독일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 부부의 그림 같은 일상으로 역사의 잔혹한 진실을 그린다. 사진 TCO(주)더콘텐츠온
이를 실제 삶의 모습처럼 담기 위해 ‘관찰 예능’ 같은 촬영법을 도입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바로 옆 회스 가족이 살던 집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당시 사진을 똑같이 재현한 세트를 짓고, 곳곳에 10여개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글레이저 감독과 제작진은 세트와 격리된 벙커에서 각 카메라 화면을 모니터하며 원격으로 촬영을 지휘했다. 한 예로, 헤트비히가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는 시각, 루돌프가 다른 방에서 소각로 기술자들과 대화하고, 나치 친위대 장교들이 마당에 모인 상황들을 동시 촬영한 것이다.

"남편 타지 발령나자, 나치 아내 날뛰었다" 증언 토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실제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 가족이 살던 아우슈비츠 이웃집을 담은 한 장의 사진에서 영화를 출발했다. 아름답게 가꾼 정원과 미끄럼틀까지 설치한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도 고증해냈다. 사진 TCO㈜더콘텐츠온
방대한 양의 역사 자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이 보유한 생존자 증언을 “고고학자가 유물 발굴하듯” 재구성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사의 사전 인터뷰에서 “회스 가족의 한 정원사는 '남편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발령 나자 헤트비히가 현재 사는 집(아우슈비츠 옆집)에 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증언했다. 참 무서웠다. 영화를 만드는 데 이런 모습이 시작점이 됐다”고 전했다.
밤새 쉬지 않는 소각장의 붉은 열기와 함께 화면 밖에서 침투하는 사운드도 인상 깊다. 영화 ‘가여운 것들’, ‘놉’ 등을 작업한 사운드 디자이너 조니 번이 아우슈비츠 상황에 대한 600쪽 분량의 연구를 토대로 2022년 파리 폭동의 비명‧고함, 기차‧총소리 등 1년간 전 세계에서 수집한 고통의 사운드를 활용해 빚어냈다.

하마스·이스라엘 공격 비판한 오스카 수상 소감 논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지난 3월 10일(현지 시간) 미국 LA 할리우드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로이터=연합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 런던 북부 교외 지역인 하들리우드의 유대인 예술가 공동체에서 자랐다”고 밝힌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 연출을 결심한 이후 10년 간 깊은 분노를 좇아왔다"고 말했다.
“아우슈비츠 소장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하자, 유대인 아버지는 지나간 일이란 의미로 ‘그냥 썩게 놔두라(Let it rot)’고 하더군요. 전 ‘그건 과거가 아니’라고 답했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밤장면들이 나온다. 회스 가족이 잠든 깊은 밤마다 포로들을 위해 건설 현장에 사과를 묻어두는 소녀의 모습이다. 그는 실존 인물로 폴란드 출신의 비유대인 소녀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우오제치크(1927~2016)가 모델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어둠의 세력에 반대하는 단순하고 순수한 선함에 매료되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도 있다는, 인간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전했다. 사진 TCO㈜더콘텐츠온
“박물관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수차례 밝힌 그는 CNN을 통해 “영화 속 담벼락은 우리가 자신의 편안함과 안전을 도모하고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분류하고 일상화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올초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인간화가 어떤 일을 초래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한 그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발생한 희생자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하마스 무장단체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보복성 폭격까지 비판한 이 발언은 유대계 공동체의 반발을 낳기도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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