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으로 1년 살기가 가능해? 삶이 달라졌다
[김성호 기자]
그저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저 인도양, 망망대해 위에서야 깨달았다.
선 곳이 달라지면 문장 또한 달라짐을 보인 일군의 위대한 작가들이 있다. 직접 배를 탔던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샤를 보들레르 같은 이들, 오랜 노숙생활을 거쳤던 조지 오웰이며, 비행기 조종사 생텍쥐페리, 리처드 바크와 같은 이들이 삶과 글, 업과 문장의 연관성을 증명해왔다. 나는 그를 좇아 배 위에 올랐다. 문장과 글 이전에 있는 세계관의 변화를 겪어보기 위해서였다.
뱃사람들이 아는 것을 배우고, 그들의 시야로 사물을 보며, 마침내는 그들의 삶을 산 시간이 있었다. 교육과 실습까지 2년여가 지나서야 나는 내가 비로소 뱃사람의 시선을 얻었음을 알았다. 에너지를, 또 그것이 오가는 길목의 무게를 알게 되었고, 항구를 전전하는 다국적 밑바닥 노동자들의 삶을 보았으며, 법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업을 꾸려가는 이들을 만나고 난 뒤였다. 다시 돌아온 육지에서 나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세상과 사건, 사물을 보았고, 그로부터 삶과 업에 적잖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컷 |
ⓒ JIFF |
내 삶은 내가 결정하겠다고 나선 여자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자본주의가 다른 여러 삶의 양식을, 이를테면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유학과 공산주의며 공동체주의, 자연주의, 기타 온갖 종교며 이데올로기를 잠식해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방식의 삶이 존재한다. 풀소유의 삶 곁엔 무소유의 삶이 있고, 패스트라이프 반대편에 슬로우라이프가 있다. 명예와 돈을 좇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엇에도 집착 않는 무위의 삶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수는 제 앞에 놓인 선택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건 우리 주변을 잠식한 목소리 큰 무엇이 오로지 제가 유일한 정답이라고 우겨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그를 의심치 못한 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써야만 멋진 삶이라고 말한다. 외모지상주의는 멋진 외양을 가꾸는 이가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종교는 오로지 종교적 삶에 충실한 이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주체적 삶을 침범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고함 속에서 스스로 제 삶의 주인으로 남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컷 |
ⓒ JIFF |
1년 동안 돈 없이 생존하기 프로젝트
순간 그녀는 비범한 결단을 내린다. 저를 둘러싼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해법처럼 보이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1년 동안 돈 없이 생존하기.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뜨거운 박수갈채와 함께 배급지원상을 거머쥔 화제작, 박정미의 116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 <담요를 입은 사람>이 이토록 과감한 프로젝트를 다룬다.
말이 돈 없이 생활하기지 그게 어디 쉽나. 영어에 능통하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외국인인 박정미다. 돈 없이 살아가기란 한국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잖은가. 입을 것이야 가진 것으로 대충 해결 한다 쳐도, 당장 잘 곳부터 먹을 것까지가 모두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당장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부터가 하나하나 난관이다.
▲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컷 |
ⓒ JIFF |
스킵다이버, 스쿼터... 그들이 사는 세상
다행히 런던은 어마어마한 도시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지천으로 버려진다. 음식점이 팔고 남은 멀쩡한 음식을 쓰레기로 내버리는 일은 환경단체를 비롯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삶을 꾸려가는 활동가들을 통하여 익히 알려진 얘기다. 그리하여 쓰레기를 뒤져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 먹는 '스킵다이빙(skip diving)'이란 행위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저 음식을 무료로 구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나친 생산이며 폐기의 폐해를 경고하는 저항운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돈 없이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박정미에게 스킵다이빙 만한 선택지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야 민망하여 쓰레기를 제대로 뒤지지 못했던 그녀다. 그러나 스킵다이버로 불리는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어느새 전문 스킵다이버로 거듭난다. 그녀의 카메라엔 초밥이며 빵, 각종 음식들이 먹음직스럽게 담긴다. 어떻게 이리도 멀쩡한 음식들을 내버릴 수 있담.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 되어 영화는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하루하루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못할 노릇이다. 안정적으로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박정미는 스쿼터들을 찾아 나선다. 이들이 하는 스퀏팅(squatting)이란 빈 건물을 무단 점거해 쓰는 일종의 부동산 저항운동이다. 토지 공개념에서 출발한 과격한 운동으로, 부동산이 그를 정말 필요로 하는 이들이 아닌 투기꾼들 손에 넘어가 공실을 남기는 상황에 저항하고자 한다. 영국에서 많은 논란 끝에 거주 목적의 부동산을 점거하는 게 금지됐으나 여전히 상업건물에 대한 스퀏팅은 금지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오래 비어 있는 상가건물에 침입하여 이를 점유하고 살아간다면 정당한 소유주라도 이들을 쫓아낼 수 없다.
▲ 담요를 입은 사람 스틸컷 |
ⓒ JIFF |
삶이 그대로 예술이 되는 순간
그녀의 여정은 멈추지 않는다. 영국을 떠나서부터는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며 수도자들과 히피들, 선의를 전파하려는 사람들을 두루 만난다. 이슬람 세계의 평범한 이들에게 환대받고 또 몹쓸 짓을 당할 뻔도 한다. 온갖 일을 겪으며 그녀는 조금씩 삶 가운데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구도자와 닮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담요를 입은 사람'이 된다.
<담요를 입은 사람>은 제가 원하는 삶의 양식을 찾아나간 한 인간의 용감한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태어난 대로, 제 앞에 주어진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박정미는 제가 진정 원하고 동조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나간다. 자본주의와 물신주의, 세상의 온갖 이념이며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제 삶을 제가 원하는 대로 꾸리지 못하게끔 이끌어가고 있음을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그로부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제 삶의 주인으로 거듭난다.
삶이 그대로 예술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박정미의 여정은 그대로 예술적이라 해도 좋겠다. 제 삶의 주인이 되고자 도전하고, 마침내 제 삶의 고삐를 쥐는 모습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감흥을 안기기 때문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JIFF |
삶으로 찍은 영화는 사람을 움직인다
실제로 범행에 노출되기까지 했던 그녀가 운 좋게 살아나고도 제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친구와 가족의 시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저답게 살기 위하여 한없이 이기적이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미 수많은 수도자가 도달했던 결론과 같이.
<담요를 입은 사람>의 가장 큰 미덕은 직접 해본 기록이라는 데 있다. 제 삶을 남과 다른 길로 직접 몰고가본 기록, 그랬더니 생각보다 멋진 일이 일어나더라는 결론, 이미 많은 이들이 겪어내고 알려왔던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가 매력적인 건 오로지 이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같은 도전이 모두 그와 같은 멋진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도전 덕에 좀처럼 닿지 못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결국 위험을 무릅써 진실에 다가서는 일이란 멋진 것이 아닌가.
영화제에서 영화를 좋게 본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최종원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영화모임을 진행하고 있다는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관객들을 이끌어가는 힘이 있는 영화"라며 "여기까지 간다고? 싶은 지점에서 더 들어간다. 정말 끝까지 가는 영화"라고 극찬했다.
최 씨는 "처음에는 딩크, 욜로 라이프를 즐기는 여성의 낭만 찾아 떠나는 브이로그 같은 감성이지 않을까 우려했다"면서도 "하지만 영화는 '보여주기 식' 삶이 아닌 '아무나 보여줄 수 없는' 삶을 보여줬다.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에는 인류애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라고 감상을 전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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