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터졌다... 박병호의 '슬기로운 이적생활'
[이준목 기자]
이적이 보약이다. KT 위즈에서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박병호가 연일 홈런포를 가동하며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1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 홈경기에 4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한 박병호는 3점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6-4 승리를 이끌었다.
박병호는 1회부터 김지찬의 볼넷, 맥키넌의 좌중간 안타로 만든 1사 1,3루 찬스에서 한화 선발 조동욱을 상대로 좌월 3점 아치를 그려냈다. 하루 전인 5월 31일 한화전에서 6회 결승 홈런을 터뜨린데 이어 2경기 연속 3점홈런이었다. 박병호는 지난 29일 이적 이후 첫 경기였던 키움전을 포함하여 4경기에서 벌써 3개의 홈런을 터뜨리고 있다.
박병호는 최근 오재일과의 1대 1 트레이드를 통하여 KT에서 삼성으로 이적했다. 온전히 박병호의 요구로 인하여 이뤄진 이적이었다. 박병호는 올 시즌 줄어든 출전 기회에 아쉬움을 드러냈고, 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선택했다.
이적 당시만 해도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박병호에게 차가웠다. 2021년 키움 히어로즈에서 FA 계약에 실패하며 선수생활의 기로를 몰렸던 박병호에게 손을 내밀어준 구단이 KT였다. 또한 지난해 포스트시즌부터 올시즌 초까지 장기화된 심각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KT는 박병호에게 꾸준히 많은 기회를 제공한바 있다. 일부 KT 팬들은 박병호가 베테랑으로서 팀보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처신을 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삼성으로 이적했어도 반등 가능성은 불투명해 보였다. 삼성에서 박병호의 주포지션인 1루수는 맥키넌이라는 정상급 외국인 타자가 건재했고, 지명타자로서는 젊은 선수들과 경쟁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38세가 된 박병호가 이미 KT에서 뚜렷한 노쇠화 조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삼성에서도 고작 우타 백업요원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박병호는 보란 듯이 삼성 이적후 단 4경기만에 이런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 올시즌 KT에서 박병호는 4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1할9푼8리(101타수 20안타) 3홈런 10타점에 그치며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그런데 삼성 유니폼을 입자마자 벌써 4할 2푼9리(14타수 6안타)에 2볼넷 3홈런 7타점을 뽑아냈다.
KT에서 44경기에 걸쳐 쏘아올린 홈런수는, 삼성에서는 불과 4경기면 충분했다. 박병호는 홈런 6개(공동 29위) 시즌 타율을 2할 2푼 6리, OPS .755로 끌어올리며 본격적인 명예회복의 시동을 걸었다.
박병호의 부활은 선수 본인의 동기부여와 구단의 신뢰, 그리고 구장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라는 평가다. 때마침 우타 거포가 아쉬웠던 팀사정이, 주전 출장을 원했던 박병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박병호가 삼성에서 때려낸 3개의 홈런이 모두 홈구장인 라이온즈파크(라팍)에서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미 박병호는 삼성을 적으로 상대했던 시절에도, 라팍에서 유난히 강했다. 라팍이 개장한 2016년 이후 박병호는 42경기에서 타율 3할 1리(153타수 46안타)에 무려 15홈런 36타점, OPS 1.058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라팍은 KBO의 쿠어스필드(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로 불릴만큼 손꼽히는 타자친화 구장 이다. 좌우 펜스까지 거리는 99m, 중앙 펜스까지는 122.5m로, 박병호가 전성기를 보냈던 키움 히어로즈(현 고척돔)의 이전 홈구장이었던 목동구장 보다도 더 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이라는 평가다. 라팍 구장 효과가 박병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재까지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다.
한편으로 야구인생에서 극심한 부진에 빠질 때마다 팀을 이적한후 귀신처럼 살아나는 패턴도 박병호만의 독특한 징크스다. 박병호는 첫 프로팀인 LG 트윈스 시절만해도 '만년 유망주', '2군용 배리 본즈'라는 오명으로 불리우며 2군에서는 잘하다가 1군에만 오면 부진을 거듭하며 자리를 잡지못했다. 하지만 2011년 히어로즈로 이적하자마자 포텐이 폭발하며 리그 MVP(2012년)에 4년연속 홈런-타점왕(2012-15), 2년 연속 50홈런(2014-15) 등 엄청난 기록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KBO리그 대표 거포로 자리매김했다.
박병호는 미국에 진출하여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두시즌을 활약했으나 메이저리그에서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국내로 복귀했다. 익숙한 KBO리그로 돌아오자마자 박병호는 43홈런을 터뜨리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2019년엔 33홈런으로 다시 홈런왕에 등극했다.
이후 박병호는 한동안 하락세를 보였고, 2021년 FA 자격을 얻은 뒤 친정팀 키움 히어로즈가 계약을 포기하면서 KT와 3년 30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박병호는 KT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 35홈런 98타점을 기록하며 통산 6번째 홈런왕에 등극하며 부활했다. 그리고 KT에서도 부진이 길어지고 팀내 입지가 흔들릴 무렵에, 다시 유니폼을 바꾸자마자 살아나는 패턴은 삼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그만큼 박병호가 심리적인 면에 많은 영향을 받는 선수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박병호는 LG 시절 이후로 주전경쟁에 처했거나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몰렸을 때는, 좀처럼 제 기량을 내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반면 자신을 믿어주고 확실하게 주전을 보장해주며 심적 안정감을 찾은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며 기량을 만개시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찌보면 프로선수로서 경쟁이나 압박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회피하려는 모습이 너무 예민하고 나약한 게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프로스포츠에서 이동국(축구)이나 서장훈(농구) 등 다른 종목의 정상급 선수 중에도 박병호같은 멘탈 유형은 적지않다.
실제로 박병호를 가장 잘 활용했던 감독들은 그를 100%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기회를 제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병호를 처음 홈런왕으로 만들어낸 김시진 히어로즈 감독이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삼진을 몇 개를 먹든 너를 무조건 4번타자로 기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강철 KT 감독도 FA 영입 첫해에는 히어로즈와 결별하고 위축되어었던 박병호를 다독이며 부진하던 시절에도 최대한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박진만 현 삼성 감독도 KT에서의 부진이나 경기감각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과감히 선발명단에 중용하며 선수의 클래스를 존중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박병호 사용설명서'가 일맥상통한다.
비록 KT를 떠나는 과정은 좋지못했지만, 박병호는 삼성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선택이 본인과 팀 모두에게 '윈-윈'이 되고 있음을 성적으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구장 효과와 감독의 든든한 신뢰를 등에 업고 박병호가 다시 한번 전성기 홈런왕의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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