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다이어리]'오바마 향수' 부르는 역대급 비호감 美 대선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이 열리는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앞. 경찰들의 도로 통제 속에 형사법원 앞은 취재진과 중계차,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과 이를 구경하려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트럼프(TRUMP)' 또는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라는 문구가 적힌 모자를 쓰고 '유죄(Guilty)'를 외치는 반(反)트럼프 시위대와 거친 언사를 주고 받았다. 이 같은 혼란은 오후 4시40분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성추문 입막음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는 속보가 전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현지 언론들은 미국 역사상 첫 유죄 평결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 나왔다며 이 같은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다. '전직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230년간 이어져 왔던 미국 사법체계의 불문율이 깨진 순간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 사건 외에도 3건의 형사 재판과 각종 민사 재판을 받고 있어 '사법 리스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기 미국 대통령 유력주자에게 줄을 서기 위한 거물들의 움직임은 본격화 되고 있다. '리틀 버핏'으로 불리는 월가 헤지펀드 억만장자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은 조만간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공식화 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올해 초만 해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공화당 내 경쟁자였던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를 지지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또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접촉을 확대하는 동시에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대통령 낙선을 위해 기업인들과 반 바이든 연대를 구성했다. 애크먼과 머스크 모두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선 안 된다는 판단에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로 기운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외교 정책, 과도한 규제와 미국 내 반 유대주의 등이 '네버(Never) 바이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업인 출신의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감세, 규제 철폐 등 친기업 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바이든 대통령 지지층 또한 그에 대한 호감 보다는 주로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에 기반하다는 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층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에머슨대가 지난 3월 전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 지지자의 30%는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바이든이 좋아서' 지지한다는 응답(26%)보다 4%포인트 높았다. 여기에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으로 분류됐던 젊은층, 유색인종 등도 인플레이션과 이스라엘 지지 정책 등에 실망해 바이든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올해 미국 대선은 어느 때보다 혼조세다. 뉴욕에 거주하는 미국인 프레드 맥널티 씨는 "바이든의 정책과 관련해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도, 그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가 재선에 성공하길 바란다"며 "트럼프는 현재 우리 시스템에서 특히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가 백악관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민주당 대선 후보를 뽑는 프라이머리(예비 경선)에서 '지지후보 없음(uncommitted)'을 선택했다. 하지만 '네버 트럼프' 심리가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미 대선은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될 전망이다. 우선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로 81세, 트럼프 전 대통령은 77세로 두 후보 모두 지나치게 고령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각종 사법 리스크까지 걸려 있어 두 후보 모두에게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은 미국인들이 많다. 일찌감치 양측의 리턴매치가 확정된 가운데 각종 네거티브 공세도 활발하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보다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반대의 정치가 난무하는 셈이다.
"Yes, We Can(우리는 할 수 있다)". 16년 전 47세의 초선 상원의원에서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대선 구호로 변화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지쳐 있는 미국인들을 믿음과 희망, 통합에 대한 기대로 뭉치게 했다는 점에서 2008년 미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긍정의 메시지로 가득 찬, 축제 같은 선거로 평가받는다. 현재 전 세계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때보다 높다. 미국이 대(對) 중국 첨단기술·무역 제재에 나서며 글로벌 공급망과 교역 구조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미·중 갈등 외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이어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까지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는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전 세계 경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정세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칠 미 대선이 '차악'을 뽑는 선거로 치러진다는 건 우리에게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젊고 매력적인 정치인 오바마를 통해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느꼈던 2008년 대선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건 미국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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