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애인 사귀어라” 했던 절세미녀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6. 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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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녀 동생에게 반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일러스트 : 강유나
“그 여자와 연애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부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기 있는 유명 여배우와 사귀어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 조롱도 비아냥도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이 행복하길 바란다면서,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진의를 의심할 수 없는 담담한 필치였다.

부인은 결혼 생활에 지쳐 있었다. 시댁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뒤였다. 처음에는 잘나가는 남편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댁 식구들과는 ‘인종’부터 다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금씩 남편을 놔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유롭게, 훨훨,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고자 했다. 남편도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여배우와 진한 사랑에 빠지며 그녀의 당부대로 살아간다.

어느 가정법원 막장 판결문에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쓰인 한 부부의 가정사. 주인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로 불리는 엘리자베스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야기다.

엘리자베스는 ‘시시’라는 애칭으로, 여전히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불려서였다. 아름답고 부유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던 ‘시시’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시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역의 옛 지배자 비텔스바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귀족 집안이었음에도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에 평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다. 맑고 맑은 소녀로 자란 엘리자베스.

그녀의 운명이 바뀌는 날이 찾아왔다. 시시의 언니 헬레나의 혼사 얘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신랑감으로는 사촌 사이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점찍혔다. 가족 전부가 오스트리아로 직접 찾아갔다. 약혼 일정을 잡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운명의 장난이 시작됐다. 프란츠 요제프가 언니 헬레나 대신 동생인 시시에게 빠져들었다. 금발의 키 큰 16세 소녀가 황태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어머니 소피에게 말했다.

“저는 헬레나의 동생 시시와 결혼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비의 자리는 그렇게 순식간에 뒤바뀐다. 1854년 두 사람이 결혼한다. 시시의 나이 고작 17살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였던 엘리자베스 아말리 오이게니 초상.
황실과 시시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이지 못했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시가 황실의 엄숙주의를 견디지 못했던 탓이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제국 분위기는 계속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1804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본국 오스트리아는 ‘제국’이라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시시가 시집을 간 1854년은 제국의 가장 유력한 세력인 헝가리마저 ‘독립’을 부르짖던 시기. 황실 분위기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시시의 우울은 짙어져갔다. 아이를 낳았지만 자주 볼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출산’마저 ‘공적인 영역’이어야 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행복마저도 박탈당해야 했다. 그녀가 살던 바이마르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던 일이다.

그녀가 마침내 숨 쉴 공간을 찾았다. 남편이 그녀를 위로하고자 찾은 지역 ‘헝가리’에서였다. 정치적 암약이 횡행하는 궁정을 벗어나, 그저 순수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키워가는 헝가리인에게 그녀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눌려 고통받고 있는 ‘동병상련’이기 때문이었을까. 이 여행을 마친 뒤부터 그녀는 헝가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날 때부터 자유주의자인 그녀는 제국의 이름으로 헝가리를 억압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헝가리 사람들도 딱딱한 오스트리아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궁에서 멀리 떨어진 시시가 다시 오스트리아 정계에 소환된 때는 1867년이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제국의 파트너로서 공식 인정하면서다. 헝가리의 국가적 지위는 ‘속국’에서 ‘제국의 동반자’로 격상됐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경된 이유였다. 엘리자베스는 헝가리의 유력 정치인이자 평소 존경하는 친구였던 안드라시를 총리로 강력히 추천했다. 프란츠 요제프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역시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헝가리의 승격은 부부 사이에 또 다른 파국을 불렀다. 시시가 마음의 안식을 헝가리에서 찾았기 때문. 둘은 사실상 별거 생활에 돌입한 것과 다름없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열정적으로 시시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비엔나로 불러올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남편이 외롭기를 바라지 않았다. 또 다른 여성을 만나 행복하게 연애 생활을 즐기기를 권유했다. 카타리나 슈라트라는 여성과 프란츠 요제프가 불륜에 빠진 배경이다. 그 여배우는 ‘왕관 없는 오스트리아 황후’라고 불렸다. 시시는 이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본인이 프란츠 요제프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그녀는 이제 여행을 다니고, 지식을 쌓으며,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나섰다.

“아드님이 자살했습니다.”

어느 날 충격적인 비보가 시시에게 전달됐다. 유일한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루돌프가 내연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부인이 있던 서른 살의 루돌프가 18살의 어린 귀족 소녀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비관해 목숨을 끊었다는 것. 시시의 삶은 또 한 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후 평생을 상복과 같은 검은색 드레스만 입고 다녔다.

시시는 이제 자신의 삶을 더욱 탐닉하기 시작한다. 모든 고통의 원흉은 비엔나에 있다는 듯, 그곳을 떠나 유럽 전역을 유랑하고 다녔다. 불화의 시대는 그러나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각 지역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제국은 민족 국가 성립을 막는 원흉으로 부각됐다. 제국의 황후는 그 정점에 선 원수 중 원수였다.

1898년 가을, 스위스 제네바를 여행했을 때다. 웬 사내가 어슬렁거리다 그녀의 몸을 훅 찌르고 도망갔다. 무기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범인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였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황망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시신이 비엔나로 운구됐다. 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라고 적혀 있었다.

헝가리인들은 소리 높여 요구했다.

“헝가리 여왕도 함께 새겨달라.”

헝가리인들에게 그녀는 ‘국모’였던 셈이다. 지금도 헝가리 곳곳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와 마을이 여럿이다. 평소 헝가리를 사랑하고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던 황후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된 것.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전에 남긴 유언장에는 그녀의 재산 상당 부분이 자선단체에 기부되도록 명시해놨다. 그녀가 죽은 지 이미 1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왔던 그 성품을 시민들은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희귀한.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1호 (2024.05.28~2024.06.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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