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빠진다는 소문에... 일본의 '커피목욕'을 아십니까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맥심 모카골드. |
ⓒ 연합뉴스 |
1976년 12월, 동서식품이 개발한 커피믹스가 등장하였다. 약사 출신의 한 기술자가 등산객이나 낚시인들이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커피로 고안한 것이 인스턴트커피, 설탕, 크림을 한 봉지에 넣은 커피믹스였다. 초기에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던 것이 2006년에 스틱형으로 진화하였다.
2017년에 실시한 특허청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발명품 10개 중 5위에 오른 제품이다. 지난 2022년에는 매몰되었던 아연 광산 광부 두 명이 커피믹스를 먹으며 버텼다는 소식이 전해져 다시 국민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76년 12월 이 제품의 첫 출시 당시에는 동서식품에서 광고조차 하지 않았고, 뉴스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제품이었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한국 차, 외국인 관광객이 가족이나 친구에게 줄 여행 기념품 선호도 1위 제품이 바로 커피믹스다.
국산 커피믹스의 본격적인 시판이 시작된 1977년은 커피 역사에서 여전히 침체기였다. 국민소득 1천 달러 달성,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식량 자급자족 달성이라는 자랑이 난무하는 시절이었지만 커피 소비 시장은 찬 바람이 불었다. 조선, 동아, 경향, 매일경제 등 4개 일간 신문에 등장한 커피 관련 기사는 77건에 불과하였다. 신문이 한가하게 커피 얘기를 다룰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새로 취임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4~5년 내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 각종 비사와 스캔들을 증언하였고, 미국 법무부는 한국인 로비스트 박동선을 기소하는 등 한미 관계가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정부는 이런 민감한 뉴스들을 국내에 전하였던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강제로 폐쇄시켰다.
▲ 커피 나무에 열리는 커피 열매 |
ⓒ 위키미디어 공용 |
미국은 지금도 작동 중인 인류 최초의 항성 간 탐사선 보이저 2호와 1호를 연달아 발사하였고, 우리나라는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고리1호기를 완성하여 송전을 시작하였다. 부가가치세와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실시된 것도 이 해였고, 이리역 폭발 사고로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이 해 11월 11일이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해 여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1975년 7월, 브라질의 검은 서리 사건에서 시작된 커피 생산량의 감소가 절정에 이른 해가 바로 1977년이었다. 1975년에 브라질 커피나무의 절반 가까이가 서리 피해를 입었고, 이 나무들은 죽어갔지만 새로 심은 나무들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커피는 발아한 후 4년 내지 5년은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브라질의 검은 서리 사건에 이어 또 다른 커피 생산국인 과테말라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커피 생산량이 감소하였고, 아프리카의 커피 생산국 앙골라에서 벌어진 내란도 커피 공급에 차질을 가져왔다. 세계 커피 재고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커피 국제 시세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형 커피 수입업자, 가공업자, 도매업자들의 사재기가 등장하여 공급 부족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커피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77년에는 1975년 대비 커피 소매 가격이 지역에 따라 75%에서 300%까지 상승하였다. 미국에서 1975년까지 5센트를 유지하여 오던 커피 한 잔 가격이 10센트, 15센트를 넘어 25센트로 치솟았다. 우리나라의 1년 커피 생두 수입액이 1천만 달러를 돌파한 것이 이해였다. 외화 낭비에 대한 비난과 함께 커피 안 마시기 운동이 벌어졌다.
이런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이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국회운영위원장은 "국산차도 좋은 게 많은데 막대한 외화를 써가면서 커피를 마시는 건 낭비"라는 주장을 하며 국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커피 대신 국산차를 대접하라는 특별 지시를 하였고, 이것을 신문에서는 '커피 사라진 국회 사무실'이라는 제목으로 받아썼다. 이 발표를 했던 국회 운영위원장 방은 마치 국산차 시음장이 되었다. 국내의 국산차 제조업자들이 이 발표에 찬사를 보내며 국산차 견본을 보내온 때문이었다. 이 풍경 또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으로' 국민을 위하고 '말로' 민생을 책임지는 데 누구보다 앞에 나서는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커피 생두 가격의 폭등에 더욱 민감한 것은 커피 소비를 주도하고 있던 서구 선진국들이었다. 나라별로 대응책을 내놓기에 바빴다. 크게 두 가지 운동이 벌어졌다. 하나는 대용커피의 개발이었다. 스위스 네슬레는 치커리를 섞은 커피를 개발하여 시판을 시작하였고, 미국의 제너럴푸드는 소맥 40%를 배합한 커피를 개발하여 내놓았다. 콩과 당밀을 섞은 대용커피 판매를 하는 회사 등도 등장하였다. 대용커피 40%를 넣은 커피는 20~30% 낮아진 가격에 판매되었다. 소비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전략이었다.
두 번째 방식은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커피를 줄이고 차를 마시자는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커피보다 차를 즐기던 영국인들은 너나없이 커피를 포기하고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차 소비가 급증하면서 찻값이 1년 사이에 4배로 폭등한 것이었다. 그래도 커피값의 1/4밖에 되지 않았다. 1977년 당시 커피 소비량이 우리나라의 1백 배인 연 30만 톤으로, 세계 3위 커피 소비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공무원들이 나서서 "커피잔을 조금 덜 채우고 대신 애국심을 담자"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커피 가격 상승으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커피소비 1위국 미국과 생산 1위국 브라질의 갈등이었다. 때마침 등장한 카터행정부가 외국의 인권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이른바 도의외교였다. 미국 국무성에서 펴내는 인권보고서에 인권 억압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일쑤였다. 1977년 인권 보고서에서 브라질이 인권탄압 국가의 하나로 표기된 것이 문제였다. 브라질은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며 두 나라 사이의 방위조약을 폐기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맞서서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는 브라질 커피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커피 안 마시기 운동을 벌여 커피 생산국을 더욱 자극하였다.
▲ 일본의 한 온천(자료사진) |
ⓒ 위키미디어 공용 |
세계적으로 커피 가격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 시절에 일본에서는 때아닌 커피 목욕이 유행하여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에 따르면 일본 도쿄의 북쪽에 있는 고소사우나센터라는 커피목욕 전문 업소는 문을 연 지 6년이 지났는데 성업 중이었다. 커피 목욕이 피부 미용에 좋다는 소문을 타고 외국인 고객들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깊이 1.5m, 길이 4m의 둥근 통에 25톤의 커피와 파인애플이 짓이겨져 들어 있는 구조였다.
이곳을 찾는 고객들은 주로 비행기 조종사, 미군, 사업가, 주부들이었는데 목욕 방법은 탕 속에 들어가 약 20분 동안 목까지 푹 담그는 것이었다. 사람이 술 원료 속에 들어가 발효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법이었다. 한번 이용하고 나면 체중이 1파운드(약 450g)씩 빠진다는 소문에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커피값이 비싸도 장사가 잘되는 것은 피부가 고와지기를 원하는 여성들 때문이라는 것이 이 센터 종업원들의 이야기였다. 탕 속의 커피와 파인애플은 비싸기 때문에 6개월에 한번 씩 교체를 하며, 입장료는 일본 돈 1천5백엔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25잔 정도 마실 수 있는 높은 가격이었다.
이 해에 씨스코라는 기업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캔 커피 2종의 시판을 시작하였다. 신문 광고를 보면 "미국풍의 본격 커피 '타임커피'"와 "프랑스식의 분위기 커피 '카페오레'" 2종이었다. 동서식품에서는 그동안 판매하던 부드러운 맛의 원두커피에 이어, 강한 맛의 유럽식 네오 칸 원두커피 판매를 시작하였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1977년 기사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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