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들고 튄 직장동료 잡아라…자전거로 쓴 '국토종주 추격전'

유주현 2024. 6. 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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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자전거 로드무비 소설’ 쓴 정진영 작가


국토종주 자전거길인 전북 진안군 모래재를 달리는 사람들. [사진 한국관광공사 오정식]
중소기업 회식자리에서 사장이 호기롭게 뿌린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 당첨금을 들고 사라진 과장을 잡아오면 연봉 1000만원을 올려 주겠다는 사장의 약속에 직원들은 SNS 속 단서를 찾아 때 아닌 자전거 국토종주에 나선다.

국내 최초 ‘자전거 로드무비 소설’이 나왔다. 직장인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5박 6일간의 일상탈출을 그린 정진영 작가(일러스트)의 신간 『왓 어 원더풀 월드』(북레시피). 자전거여행이라는 낭만적인 테마에 고용문제 등 사회적 소재, 로또당첨이라는 판타지에 미스터리 추격전과 반전의 휴먼드라마까지, 한편의 영화가 그려진다. 팔당역에서 능내역, 비내섬, 탄금대, 이화령고개를 넘어 낙동강하굿둑에 이르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홍보영화로 딱이다. 추격자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펼쳐지는 풍광과 맛집 등 ‘하드웨어’는 모두 실존하니, 국토종주 도전자를 위한 가이드북도 된다.

황정민·윤아 주연 드라마 ‘허쉬’ 원작자

정진영 작가

일간지 기자 출신 정진영 작가는 실제 자전거 마니아로, 고용노동부를 출입하며 수집한 중소기업 직장인들의 애환과 본인의 국토종주 경험을 버무려 소설을 썼다. “2016년 부장과 대판 싸우고 무작정 떠났거든요. 돈 안드는 여행이란 생각만 했지 아무 개념도 없는 상태로 저렴한 미니벨로 한 대만 사서 ‘개고생’을 했습니다. 1주일 만에 간신히 도착한 낙동강엔 별것 없었어요. 근데 집에 돌아오니 자꾸 생각이 나는 거죠. 4~5년간 전국의 인증된 자전거길은 모조리 달렸습니다.”

2011년 『도화촌 기행』으로 등단한 정 작가는 황정민·윤아 주연 드라마 ‘허쉬’(2020)의 원작자다. 앉아서 상상하기보다 발로 뛰어 취재한 현실밀착형 소설을 쓰는 게 모토인 소위 ‘사회파 작가’인데, 비교적 말랑한 신간이 “가장 어렵게 쓴 장편”이란다. “지금까지 쓰던 심각한 소설과 결이 달라요. 자전거길에서 풀내음 섞인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그 좋은 기분을 전하느라 힘들었죠. 그렇다고 한가한 힐링소설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하니까요. 회사일이 바빠 엄두를 못내다가, 2020년 전업작가가 돼서 두 번째 국토종주를 한 다음 본격적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로또 당첨자를 추격한다는 설정만 허구일 뿐, 거의 실제상황이다. 고라니 울음소리와 뱀 출현에 기겁하고, 오밤중에 멧돼지와 대치하는 에피소드도 다 경험담이다. “앉은뱅이소설을 제일 싫어해요. 지금 벌어지는 우리 이야기를 쓰고 싶죠. 등장인물들도 아무 경험없이 국토종주에 나선 셈이라 제 경험들을 살려봤어요. 그렇다고 다큐와는 달라요. 다큐는 한발 떨어져 보게 되지만, 소설은 그 안에 몰입해서 간접경험을 하게 되잖아요.”

정진영 작가의 소설 『왓 어 원더풀 월드』. [사진 북레시피]

회식자리에서 뿌린 로또 당첨금을 회수하려는 사장의 찌질함도 사실적이다. 그 역시 2006년부터 한주도 빠짐없이 로또를 사고 있다는데, 거기서 추격전의 아이디어도 싹텄다. “누구나 일확천금의 꿈이 있고, 제 모습도 투영돼 있죠. 저는 매주 같은 번호를 사다보니 한 주라도 안 사면 불안해요. 그사이 그 번호가 당첨될까봐요.(웃음) 소설 속 ‘1, 2, 3, 43, 44, 45’ 라는 번호도 영 황당하진 않아요. 몇주 전 ‘11, 13, 14, 15, 16, 45’가 나왔잖아요. 현실이 소설보다 더한 셈이죠.”

그는 두번의 국토종주가 “생애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길마다 나타나는 다채로운 풍경을 만나며 인생을 절로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강 따라 달리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못보고 살았나 싶고, 우리나라 살 만하네 느끼게 돼요. 물론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주인공도 계속 다니던 회사를 다니지만 훨씬 긍정적인 사람으로 진화하잖아요.”

국토종주 자전거길에 선 정진영 작가.

그는 자전거길 예찬론자다. “이렇게 살찐 내가 미니벨로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는 게 자전거길이 없었다면 엄청 위험한 일”이란 것이다. 초심자에게도 안전한 자전거길이 애초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2009년부터 4대강 정비사업과 함께 전 국토를 일주할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닦였다. 이후 방치되어 오다 이번 정권 들어 정비사업을 재개해 올해까지 총 2237㎞의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완성될 예정이다.

“최고의 코스는 한강 자전거길 양평구간”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같은 지역이라도 자전거길은 차로 가거나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차로 하는 건 여행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풍경을 보고 지나가도 하나도 기억이 안나니까요. 서울서 대전까지 3박 4일 걸어도 봤는데, 하루종일 풍경이 똑같아요. 자전거는 딱 그중간이죠. 모든 풍경을 보면서 속도도 적당해요. 이런 인프라가 세계적으로도 드문데, 그래서 자전거타는 사람들이 MB 안 미워해요.(웃음) 주요 길목에 있는 인증센터도 중요하죠. 여권처럼 스탬프를 찍게 돼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달릴 수 있어요. 힘들다가도 인증센터가 얼마 안남았다는 걸 알면 동기부여가 되거든요.”

자전거 여행이 마냥 안전하진 않다. 밤길을 달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멧돼지와 대치한 순간은 생애 가장 큰 공포였어요. 밤에 혼자 산길을 힘겹게 내려온 순간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 거죠. 10분 넘게 대치했는데, 결국 멧돼지가 논두렁을 점프해 사라지길래 허벅지가 터져라 페달을 밟았죠. 사실 밤이 아니면 뱀이나 고라니를 만나도 안 위험해요. 야생동물은 사람을 보면 다 도망가거든요. 심지어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 뱀을 만난 적도 있는데, 개구리를 뱉어놓고 도망가더라구요.(웃음)”

그의 말처럼 자전거 여행이 다 드라마는 아니다. 다만 “능동적으로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의 영향력”을 전하고 싶단다. “요즘엔 신입사원 부모가 회사에 전화를 한다죠. MZ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뭔가 스스로 성취해본 경험이거든요. 주인공은 끝까지 완주를 해본 거고, 한번 해보면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어요. 저부터 국토종주를 하고 나니 뭐든 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퇴사하고 쓴 게 드라마 ‘허쉬’ 원작인 『침묵주의보』였죠. 작게나마 성취한 경험이 얼마나 삶에 영향을 주는가를 그리고 싶었어요.”

전국의 모든 자전거길을 섭렵한 뒤 꼽는 최고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한강 자전거길 양평구간’을 강추했다. “초심자가 자전거길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양평이죠. 경의선이 지나가서 접근성도 좋고, 길도 편하고 풍경도 아름답거든요. 가장 아름다운 곳은 섬진강이고요. 제일 여행다운 맛은 제주도죠. 자전거 대여도 잘되고 숙소와 음식점, 편의점이 다 훌륭하니까요. 동해안은 숙소가 없고, 낙동강엔 아무것도 없어요.(웃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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