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식탁' 출신 소년, 미국 자유시의 아버지가 되다

장소영 2024. 6. 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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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일에 찾은 월트 휘트먼 생가... 그가 노래했던 몸과 대자연, 인생, 애국심 그리고 민주주의

[장소영 기자]

1829년 11월 16일, 브루클린의 모리슨 호텔 강당에 아버지를 따라와 연설을 듣고 있던 열 살 소년이 있었다. 학식 있는 강연가나 인기 정치인도 아닌, 그저 작은 기독교 종파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노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연설이 청중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소년은 연사의 말과 언어의 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연사의 이름은 엘리아스 힉스. 소년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이름이었다. 언젠가는 엘리아스 힉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힉스처럼 전달력이 강한 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날 이후, 엘리아스 힉스는 노구에 덮친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2월 소천했다. 아마도 힉스는 자신이 미래의 위대한 시인이 될 소년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위대한 한 시인의 이름 뒤에 후광처럼 자리할 줄은 더더군다나 몰랐을 것이다. 
 
▲ 꿈을 이룬 가난한 소년, 월트 휘트먼 퍽퍽한 생활중에도 휘트먼의 부모님은 애국심과 현실과 마주한 신앙을 놓치지 않았다. 휘트먼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고, 10살 무렵 불을 뿜는 노인 엘리아스 힉스의 연설에 크게 자극 받았다. 그는 힉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힉스처럼 언어의 힘이 가득한 글을 쓰고 싶었다. 결국 그 꿈을 이루어, 힉스에 대한 에세이와 자신의 시집 <풀잎>을 세상에 내놓았다.
ⓒ 장소영
 
고단한 시절을 지나 소년은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힘을 가진 시어로 가득한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을 내놓으며 '미국 자유시의 아버지'가 된 월트 휘트먼. 5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난 그가 떠올라 지척에 있는 휘트먼의 생가(Birthplace)를 찾았다. 
 
▲ 휘트먼 생가 역사 보존구역  롱아일랜드 주민에겐 익숙한 110번 도로의 북쪽은 월트 휘트먼 로드라 명명되어 있다. 헌팅턴에 있는 휘트먼의 생가는 올드 월트 휘트만 로드라는 샛길에 있어 자칫 놓치기 쉽다. 안내를 위한 센터에는 작은 전시장이 있고, 가이드를 따라 생가와 정원, 트레일을 걸을 수 있다.
ⓒ 장소영
  
"오 캡틴! 나의 캡틴! (O Captain! My Captin!)" 

맞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 나오는 대사이자 휘트먼의 시이다. 학교를 떠나는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 분)을 캡틴이라 부르며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서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명문대 진학이 목적인 사립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삽입하는 선생이기보다, 각기 다른 개성과 재능을 가진 소년들과 함께 세상의 파고를 넘는 선장이고 싶었던 키팅 선생님. 그에게 휘트먼의 시 '오 캡틴! 나의 캡틴!'만큼 꼭 맞는 시는 없을 것이다. 시의 원 주인공인 링컨 대통령처럼, 비운의 사건으로 갑자기 떠나게 된 점도 비슷하고. 

'오 캡틴! 나의 캡틴!'은 휘트먼이 링컨에 바친 네 편의 헌시 중 가장 유명한 시이다.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지만, 끝내 항구에 다다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선장을 향한 외침. 아니나 다를까, 휘트먼 생가 안내센터(Interpretive Center)에 들어서자 이 시가 바로 눈에 띄었다.  
 
▲ 포드 극장과 링컨을 향한 휘트먼의 시 '오 나의 캡틴' 링컨은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갑자기 암살당했다. 남북전쟁당시 북군의 편에서 병사들을 간호했던 휘트먼은 노예문제에 대한 링컨의 노선과 전후 사면과 남부재건에 뜻을 둔 링컨을 지지했다고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오 캡틴, 나의 캡틴'은 링컨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쓴 휘트먼의 명시이다.
ⓒ 장소영
 
 물고기 모양의 섬, 파우나목에서 생의 여정을 시작하다 

가이드를 기다리며, 찬찬히 센터 내부를 둘러보았다. 휘트먼의 선조는 맨해튼 동쪽 섬 롱아일랜드로 이민을 와 농장을 개간하던 퀘이커 교도였다. 휘트먼의 부모님은 정통 퀘이커는 아니었지만, 아들 삼 형제에게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애국심이 남달랐고 신앙이 세상 속에서 공공의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때문에 퀘이커 내에서 별난 지도자로 소문난 엘리아스 힉스에게 호감이 있었다. 

엘리아스 힉스는 평화를 중요시하는 여느 퀘이커와는 달리,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소명)' 곧 성경의 가치가 구현되는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인물이었다. 힉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유달리 노예 해방 운동에 열심이었다. 휘트먼의 생가에서 불과 10km 정도 떨어진 엘리아스 힉스의 집도 지하철도 정거장이라 불리는 탈주 노예들의 은신처로 쓰였다. 

휘트먼의 생애를 보여주는 작은 전시장은 그의 정신적 지주인 부모님과 그에게 내면의 빛을 심어준 엘리아스 힉스의 초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 물고기 모양의 섬에서 태어나다 휘트먼은 훗날 롱아일랜드를 회고하며 '물고기 모양의 섬'이라 불렀는데, 이후로 사람들이 롱아일랜드를 부를떄 즐겨 쓰는 표현이 되었다. 휘트먼이 롱아일랜드를 지칭한 파우나목(Paumanok)은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롱아일랜드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휘트먼의 집안은 선조대로부터 퀘이커 형제회에 속해 있었다. 애국심이 탁월한 부모님은 엘리아스 힉스의 진취적인 현실 신앙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휘트먼의 어린 시절을 설명한 부스에도 부모님과 함께 엘리아스 힉스가소개되어 있다.
ⓒ 장소영
 
인생의 파고를 온몸으로 맞고 견디면서도 그것을 광활하다 노래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휘트먼은 곱게 자란 문학 소년이 아니다. 이 짧은 전시장만 둘러봐도 그의 생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농장보다 목수 일에 더 재능이 있었던 휘트먼의 아버지는 휘트먼이 태어난 이 조그만 2층 오두막을 손수 지었다. 발전하는 도시를 보며 자신의 손재주가 돈이 될 거라고 여겨 가족을 데리고 브루클린으로 이사했지만, 가난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했다. 덕분에 어린 휘트먼도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휘트먼은 맨해튼, 브루클린 그리고 롱아일랜드를 오가며 인쇄공, 편집장, 교사, 목수, 공무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대로 미 대륙을 돌아다니며 대자연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고, 오페라와 문학을 탐독하는 한편 마천루 아래 신음하는 도시 노동자와 노예들의 비참한 현실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남북 전쟁 중엔 북군의 간호사로 일하며 전시 상황은 물론 군인들과도 깊이 접촉했다. 그의 시와 저서는 그가 온몸으로 빨아들인 현실의 산물인 셈이다. 
 
▲ 월트 휘트먼 생가 목수였던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휘트먼은 네 살 무렵까지 이곳에서 성장하다가 브루클린으로 이사했다. 휘트먼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뉴욕과 롱아일랜드에 대해 편안히 받아드리며 회상의 구절을 써내려갔다. 그만큼 뉴욕일대에서 보낸 휘트먼의 시간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 장소영
 
자본주의의 살벌함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전쟁의 참혹함도 지켜보았던 휘트먼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시민 안녕을 위한 국가 제도를 확신할 수 있었을까. 허무함과 비통함, 좌절이 작품 속에 가득해야할 듯 한데 오히려 그의 시에는 뭔가 진취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가이드에게 뭐라고 질문을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고 있는데, 옆의 관광객이 '그의 모든 시간이 분투(struggle)였구만'하고 중얼거린다.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생존을 위해, 시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뇌졸중과 같은 병마에 대항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미국이라는 사회의 이상적인 지향점을 향해 휘트먼은 계속 고심하며 분투했고, 서른 세 번이나 수정과 재출간을 거듭했다는 시집 <풀잎> 서두의 외침처럼 마침내 그 자신이 한편의 장대한 시가 되었다('your very flesh shall be a great poem'). 
 
▲ <풀잎> 서문과 민주주의 향한 열정 작은 전시실이지만 꽤 알차게 꾸며져 있다. 휘트먼은 평생을 두고 시집<풀입>을 수정해 나갔다. 기존 시 형식을 파괴하고, 정제되지 않은 시어와 소재로 인해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가장 미국다운 시'로 인정받고 '미국 자유시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휘트먼은 정치적 입장이 또렷하고 민주 시민에 의한 수준높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연사와 저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 장소영
 
"호기심을 가져라, 판단하지 말고"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다 보면 여러 스타일의 가이드를 만난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나는 사실 옛날 생활 소품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러니 소품 하나하나를 상세히 설명하는 가이드에게서 자꾸 멀어져 딴생각이 들었다. 좁고 작은 식탁을 보면서도 그랬다. 서민들은 밥때라고 해서 딱히 먹을 것이 없었단다. 9형제를 거느린 휘트먼의 집도 그랬을 것이다. 그저 식구들이 둘러앉아 엄마가 가지고 오는 솥이나 쟁반위의 음식에 손이라도 닿게 식탁이 좁고 작았다고 한다. 

휘트먼도, 휘트먼이 우러러보았던 엘리아스 힉스와 링컨도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마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좁은 식탁' 위의 소년들이었다. 그럼에도 방대한 독서량과 독학으로 스스로를 세워 나갔고, 설득력 있는 말과 글의 능력을 갖추었다. 개인의 영달보다 각자의 분야에서 이상적인 미국 사회를 위해 항해했던 세 사람을 짧은 영상으로 보고 있자니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세계적인 석학과 명문대가 넘쳐나고 요즘은 왠만한 교회 목회자도 유학은 필수라는데, '좁은 식탁' 출신 엘리아스 힉스나, 링컨이나, 휘트먼을 능가하는 이는 좀처럼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휘트먼은 청년들이 유행에 휩쓸리는 점을 우려했고, 예술과 문학의 힘이 건강한 민주 시민과 민주 사회를 만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인문학의 힘'이 소멸되고 있는 시대라 그런지 한 세기 전 그의 말이 마치 예언처럼 들려왔다. 오늘날엔 좋은 지도자가 나지 않는 걸까. 선출되지 못하는 걸까. 길러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답도 없는 몽상에 젖어 있는데 투어를 마칠 시간이 왔다. 다들 뭐라고 인사해야 할지 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휘트먼의 시집 <풀잎>  마지막 시의 제목이자, 그 덕에 미국에서 널리 쓰이게 된 인사말이 있다. 휘트먼의 유행어인 셈이다. 
   
"So long! (잘가요!)"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벽 위에 휘트먼이 남긴 말인듯한 장식이 보였다. 무심코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르다가 문득 드라마 '테드 래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테드 래소도 벽위에 씌여진 휘트먼의 말을 읽었다고 했었는데. 

미식 축구 코치 태드 래소는 자기를 얕보기만 하는 거만한 기업인에게 휘트먼의 명언을 일러준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져보라고(Be curious, not judgmental). 그렇다. 나부터 호기심어린 눈으로 좁은 식탁앞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봐주고, 할 수 있다면 빵과 책을 그들 곁에 슬며시 놓아주고 싶다. 장대한 시가 되는 삶은 아닐지라도 점 하나쯤은 찍을 수 있지 않을까. 
 
▲ 휘트먼 생가 역사보존구역 작지만 알차게 꾸며진 전시장과 생가, 트레일을 가이드와 함께 돌아볼 수 있다. 풀잎 관련 자료는 물론 역사 보존구역으로 지정되던 당시의 기록물도 전시중이다.
ⓒ 장소영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엘리아스 힉스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연재글 '미국 흑인 역사의 달에 찾아간 노예 탈주로'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05219&SRS_CD=0000016705)에서 조금더 상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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