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가 막차, 차 없어 학원 등록도 포기... 또 다른 '교통약자'
농촌지역인 충북 옥천의 청소년, 자녀를 양육하는 주부, 면 지역 주민, 고령운전자 등을 만나 이들의 생활 속 이동권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5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월간 옥이네]
▲ "제일 불편한 건 막차 시간이에요. 오후 6시 넘으면 들어갈 준비를 해야 돼요. 이번에 중간고사 앞두고서 종종 옥천읍에 공부하러 갔는데, 이동시간만 1시간은 넘게 걸리니까 집중이 잘 안돼도 집에서 하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어요." |
ⓒ 월간 옥이네 |
교통약자란 '일상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청소년 등은 물론 '누구나' 교통약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충북 옥천 청소년들을 만나 이들이 겪는 이동권 문제를 들어봤다. 뚝뚝 끊긴 인도, 그나마 있는 인도에 올라온 불법주차 차량, 긴 버스 배차와 더불어 저녁 먹을 틈도 주지 않고 끊겨버리는 버스... 이 앞에 선 우리 지역 청소년의 이동권은 안녕할까. 옥천읍과 안남면, 그리고 청산면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청산고등학교 2학년 길은호·이지수씨 ▲옥천고등학교 1학년 이한나씨 ▲안내중학교 3학년 성가람씨)의 경험을 나눈다.
안전하지 않은 동네 한 바퀴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면 50분 정도 걸려요. 긴 시간이지만, 사실 저한테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아요. 옥천읍을 다니는 버스가 없으니까 어릴 때부터 어디든 걸어 다녀야 했거든요. 자주 가는 학교, 도서관, 청소년 수련관 다 도보 40분은 기본이에요."
옥천읍 대천리에 거주하는 이한나씨는 올해 옥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2km가 넘어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날은 한 시간 일찍 나와야 한다. 주로 아버지 차를 이용하지만, 모든 일정에 부모님이 동행할 수는 없으니 혼자 길을 나서는 때도 많다.
"얼마 전에 시험이 끝나서 보건소 앞에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갔어요. 보통 밤 12시 넘어서 집에 가는데, 읍내에 약국 많은 사거리 있잖아요. 거기 신호등이 오후 10시 30분이 지나면 꺼져요. 늦은 시간이라 차가 많이 안 다닌대도 길을 건너려니 긴장됐어요."
흔히 면 지역에 비해 읍은 버스 이동이 쉬우리라 생각하지만,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읍내 마을 간을 연결하는 버스는 많지 않고 그나마도 외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더 적기 때문이다. 읍내 순환버스가 없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의 이동은 주로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는 물론, 인도 사정도 여의찮다.
"인도가 없어서 차도로 다녀야 하는 길이 많아요. 혹시 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사고 날까 봐 이어폰도 한쪽만 끼고 다녀요. 그런데 인도가 있는데도 차도로 가야 할 때가 있어요. 불법주
차 때문이에요. 아예 인도 위로 올라와 주차하는 차도 있더라니까요."
그나마 사정이 나은 읍내 중심가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나타나는 문제는 어둠이다. 인구가 적은 동네라 가로등도 적은데, 그마저도 유지·보수가 잘 안된다고. 익숙한 동네 골목이지만, 빛이 사라진 길은 새삼스럽게 겁이 난다.
▲ "인도가 없어서 차도로 다녀야 하는 길이 많아요. 혹시 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사고 날까 봐 이어폰도 한쪽만 끼고 다녀요." |
ⓒ 월간 옥이네 |
어떻게 집에 갈지는 내가 정한다
면 지역 청소년의 상황은 어떨까. 밤 12시 50분이 되자 조용하던 안내면 인포리에 택시 4대가 등장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택시는 곧장 안내중학교 진입로로 들어선다. 정문 앞 줄지어 주차된 택시의 정체는 안내중학교 통학택시다. 옥천군 농어촌학생 학생 교통비 지원 조례에 따른 행복교육택시 지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안내중학교에서는 이를 학교 차원에서 관리해 학생들이 별도의 절차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너 명씩 한 택시를 타고 통학해요. 제가 타는 택시는 안남면 연주리부터 지수리까지 가요. 같이 타는 애들 중에 제가 학교랑 제일 가까이 사는 덕분에 제일 늦게 타고 일찍 내릴 수 있어요(웃음). 통학택시 타면 집까지 6분이면 갈 수 있어요. 지수리도 15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안내중학교 3학년 성가람씨가 사는 안남면 연주리에서 학교까지는 5km 남짓. "오전 8시 버스를 타고 등교할 수도 있다"지만 배차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버스 하나를 놓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지각이다. 무엇보다 이 또한 버스 노선이 지나는 동네에 사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선택지. 덧붙여 버스를 이용하게 될 경우 매달 약 5만 원의 교통비가 발생하는데 이 또한 중학생들에겐 큰 부담이라고. 때문에 가람씨는 "통학택시는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말한다.
가람씨가 자주 이용하는 두 번째 교통수단은 안남면 순환버스다. 방과 후 안남면 배바우작은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하는 순환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한단다. 재밌는 건 순환버스가 도보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10분 걸리는데 순환버스 타면 노선 때문에 집까지 30분이나 걸려요(웃음). 그래도 버스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시원하게 집까지 갈 수 있어서 마을버스 타는 걸 더 좋아해요."
순환버스 막차 시간이 오후 5시 30분으로 일러 아쉬움이 있지만 도보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어 좋다는 가람씨다.
이동하지 못해 포기하는 것들
"동네에 공부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요.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실내 공간인 배바우작은도서관도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거든요. 그럼 공부할 공간은 집밖에 없는데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되잖아요."
이렇다보니 시험 기간엔 옥천읍에 있는 교육도서관까지 가기도 한다. 하지만 매일 읍까지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읍에서 출발해 마을로 돌아오는 시내버스는 오후 7시가 마지막.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오후 4시 40분은 넘어야 학교수업이 끝나다보니 옥천읍에 나가는 날은 오후 3시에 마치는 금요일과 주말뿐이다.
"옥천읍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어서 타고 나가는 건 괜찮아요. 지수리 같은 경우는 2~3시간에 한 대씩 있어서 친구들이랑 시간 맞추기가 어렵긴 하지만요. 제일 불편한 건 막차 시간이에요. 오후 6시 넘으면 들어갈 준비를 해야 돼요. 이번에 중간고사 앞두고서 종종 옥천읍에 공부하러 갔는데, 이동시간만 1시간은 넘게 걸리니까 집중이 잘 안돼도 집에서 하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어요."
▲ 충북 옥천의 한 버스정류장 |
ⓒ 월간 옥이네 |
청산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지수·길은호씨는 평일엔 기숙사에서 생활하지만, 주말이면 옥천읍에 있는 집에 돌아가는데, 이때 버스 배차시간이 매번 고민이다.
"금요일 수업이 오후 3시 30분에 끝나는데, 옥천읍 가는 버스가 오후 4시 30분이에요. 좀 더 일찍 차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쉬워요. 집에 가는 것보다 더 문제는 월요일 등교예요. 오전 8시 30분까지 등교하면 되는데도 무조건 6시 40분 차 타고 들어와야 해요. 다음 시간 차 타면 지각이거든요. 오전 7시 30분 급행 하나만 더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길은호씨)
버스 한 대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짧게는 한 시간에서 두세 시간 뒤에야 오기 때문에 등교 버스는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버스'가 된다. 옥천읍에서 청산면까지 급행으로는 40분, 완행으로는 1시간 10분이 걸린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등교에 짧아지는 수면시간과 피로는 온전히 이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다.
안남뿐 아니라 청산 역시 옥천읍 출발 막차가 오후 7시 무렵, 무얼 하든 이르게만 느껴지는 막차시간이다. 옥천읍으로 학원을 다니는 경우에도 버스 배차에 일정을 맞춰야 하기에 다음날 새벽 등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한나씨 또한 "이른 버스 시간 때문에 친구들이 포기하는 건 '더 놀고 싶은 마음'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학원에 다니며 학업을 보충하고 싶어도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아 아예 학원 등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청소년이 말하는 이동할 권리
"청소년에게 이동할 권리는 청소년에게 문화를 즐기고, 교육에 접근할 권리이기도 해요. 이동에서 막히면 그 모든 기회를 누릴 수 없어지는 거죠."
한나씨는 올해 옥천군청소년참여위원회 '청존' 위원장으로 선임돼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장 선임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는 '국회의원 모의투표 프로젝트'. 이는 지난 3월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옥천·영동·보은·괴산(동남4군) 청소년이 연합한 행사로, 단순히 모의투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닌 청소년의 시각에서 지역에 필요한 공약을 제시, 국회의원 후보에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동남4군 청소년 118명에게 의견을 들었는데, 이동권 관련한 이야기가 정말 많았어요. 대중교통 배차 시간이 너무 길다거나, 막차가 너무 이르다는 이야기들이었죠. 다 다른 지역인데도 청소년들이 가진 고민이 비슷하더라고요."
3월 8일부터 14일까지 진행한 '국회의원 후보자에게 바란다! 동남4군 청소년 설문조사'에서는 대중교통 개선(▲막차 시간 조정 ▲버스 추가 운행 ▲셔틀버스 운행 등)과 더불어 보행 환경 개선(▲가로등 및 신호등 설치 ▲인도 증가 등) 의견도 나왔다.
지난 4월 모의투표 개표방송까지 진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청존은 "앞으로 청소년 정책제안서를 발표하는 '정책마켓(가제)'과 더불어 청년네트워크, 청년발전위원회와 연합한 '청년간담회'를 진행해 보려 한다"며 활발한 활동을 예고했다.
한나씨는 "옥천군 청소년(10~19세)이 4천여 명인데도 청소년을 어엿한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청존 등 청소년 활동이 더 활발해지고, 지역에서도 청소년들의 활동과 의견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 올해 충북 옥천군청소년참여위원회 ‘청존’ 위원장으로 선임된 이한나씨는 “청존 등 청소년 활동이 더 활발해지고, 지역에서도 청소년들의 활동과 의견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
ⓒ 월간 옥이네 |
이동의 제한은 청소년들에게 많은 것을 포기시킨다. 놀 장소, 공부할 기회, 새로운 시도, 낯선 상상까지. 청소년들이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당연하게 요구하고 경험하며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물었다. "더 많은 이동의 자유가 허락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성가람 : "음... 잘 모르겠어요. (시내버스가 한 시간마다가 아니라 20분마다 온다거나) 그게 된다고요? 그럼, 막차 시간도 늘릴 수 있나요? 그렇게 된다면 친구들이랑 옥천읍에서 실컷 놀다가 올래요. 한참 재밌고, 진지한 이야기 하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적 많았거든요. 막차 시간 늘어나면 놀다가 흥 깨질 일이 없어지겠네요(웃음)."
이한나 : "청존 회의를 청소년 수련관에서 하는데, 읍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요. 순환버스나 셔틀버스가 생긴다면 청소년 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훨씬 좋아질 것 같아요. 지금 면에서 오는 위원이 한 명이 있어서 회의 시간을 버스 시간에 맞춰서 잡거든요. 시내버스 배차가 많아진다면 회의 시간도 더 자유로이 잡을 수 있겠죠? 그럼, 면에서 청존 참여하는 청소년도 훨씬 늘어날 거예요."
월간옥이네 통권 83호(2024년 5월호)
글·사진 이혜빈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정기구독하기 (https://goo.gl/WXgTFK)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태원으로, 구의역으로, 광주로... "나는 유족" 고백한 하림의 5월
- [단독] 김건희 이름 뺀 YTN 부장 "힘있는 쪽 표적 될 필요없어"
- '채상병 수사 외압' 대통령실-국방부 핵심라인, 13일간 총 27회 통화
- 윤 대통령 인척 동생, 대통령실 시민사회비서관으로 승진
- [단독] 박희영 재판 때마다 용산구청 공무원 평균 15.4명 동행
- 달라진 민희진, 하이브에 화해 제안 "뉴진스 쉬면 서로 손해"
-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 바이든 "이스라엘이 3단계 휴전안 제시... 전쟁 끝낼 때"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국회의원회관에 쏟아지는 꽃들, 이거 괜찮습니까?
- [단독] 최재형 보은군수·공무원 20명 평일 근무시간에 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