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끝나지 못한 '우묵배미'에서 나눈 불륜
[양형석 기자]
1992년에 출판된 고 로버트 제임스 윌러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세계적으로 1억8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90년대 영화 순위 베스트10에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공동 1위에 선정했고 국내에서도 1995년에 개봉했다가 2017년에 재개봉 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중·장년층 관객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어른들의 사랑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소설이 인기를 끌었을 때부터 '불륜미화'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실제로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두 자녀를 둔 주부로 갑자기 나타난 매력적인 남성 로버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지금도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수시로 소환되는 작품이다.
▲ 1990년 백상예술대상 대상에 빛나는 <우묵배미의 사랑>은 지난 2018년에 재개봉했다. |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흥행과 예술성 겸비했던 1990년대 대표 감독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존재조차 희미하고 1980년대 태생에게도 잊힌 인물로 기억 되겠지만 장선우 감독은 1990년대 한국영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다. 대학시절 고고인류학을 전공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을 당하기도 했던 장선우 감독은 영화평론가 및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1986년 <서울황제>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1988년 <성공시대>를 통해 서울 관객 10만을 돌파하며 흥행감독으로 떠오른 장선우 감독은 1990년 박중훈과 최명길이 출연한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을 선보였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기혼자들의 사랑'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우묵배미의 사랑>은 그 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과 대상을 수상했다. 장선우 감독은 1993년에도 <화엄경>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선우 감독의 전성기는 1990년대 중반이었다. 장선우 감독은 1994년 신인배우 정선경을 캐스팅해 만든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서울관객 38만을 동원하며 그 해 개봉한 영화들 중 흥행성적 1위에 올랐다. 배우 이정현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영화 <꽃잎>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총에 맞고 쓰러진 엄마의 손을 뿌리치는 소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수의 국제영화에서 호평을 받았고 서울관객 21만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렇게 선보이는 작품들마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붙잡으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군림하던 장선우 감독은 1997년 길거리 문제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나쁜 영화>를 연출하며 논란이 됐다. 그리고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선정성 논란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문제작 <거짓말>을 선보이며 과감한 영화적 실험을 이어갔다(<거짓말>은 많은 비판 속에서도 서울관객 30만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장선우 감독은 2002년 100억 원 가까운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선보였다.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혹평 속에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고 결국 장선우 감독은 그 후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비록 5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감독 커리어가 끝났지만 1990년대 장선우 감독이 보여준 상업적, 예술적 성과들은 영화 한 편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폄하될 수 없는 부분이다.
▲ 여느 연인들처럼 수줍게 시작했던 일도(오른쪽)와 공례의 사랑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우묵배미의 사랑>이 개봉한 1990년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9.9%로 세계평균성장률(2.92%)보다 6.98%나 높았다(한국은행 기준). 그만큼 경제 호황의 시대였지만 그 시절에도 그늘로 내몰렸던 빈민들이 존재했고 <우묵배미의 사랑>은 경기도 외곽 시골마을의 치마공장에서 만난 가난한 기혼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사실적으로 그린 멜로 영화다. 사실 소재만 보면 장편영화보다는 아침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 더 잘 어울릴 법 하다.
지금도 기혼자들의 외도와 불륜은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더 많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장선우 감독은 20대 중반의 떠오르는 신예 박중훈과 우아한 이미지의 스타배우 최명길을 캐스팅해 유부남, 유부녀의 사랑을 다룬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를 만들었다. 당연히 <우묵배미의 사랑>은 개봉과 함께 많은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치마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 호감을 느낀 일도(박중훈 분)와 공례(최명길 분)는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멈추지 못한다. 실제로 불륜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 영화를 감상하면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두 주인공이 가까워지는 과정은 여느 멜로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일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박중훈은 <우묵배미의 사랑>을 통해 만 24세의 젊은 나이에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젊은 나이에 쉽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한 박중훈의 열연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일도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인간쓰레기'가 따로 없다. 뻔히 아내가 있음에도 외간여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공례와 살림을 차린 후에도 술에 취해 성매매 여성과 또 다시 바람을 피면서 그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이 때문에 영화 후반 다시 만난 공례에게 사랑한다고 애원하는 일도의 절규도 관객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1990년에 개봉한 <우묵배미의 사랑>은 그 시절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거리에는 주윤발, 유덕화, 왕조현 주연의 홍콩 도박영화 <정전자> 포스터가 걸려 있고 공장이나 다방에서는 주현미의 <짝사랑>과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같은 1980년대 '유행가'가 흘러 나온다. 이 밖에 대우 바네트 트럭이나 프론트 엔진 버스, 녹색택시처럼 지금은 '추억'이 된 소품들도 많이 볼 수 있다.
▲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연서는 결혼 후 때로는 남편도 때리는 억척스런 아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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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까지 일도와 공례의 사랑과 외도에 중점을 둔 영화는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일도의 아내 연서가 집을 나간 일도를 찾아 다니는 것으로 스토리의 중심이 이동한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일도를 찾아낸 연서는 일도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화풀이를 하는데 흡사 종합격투기 기술을 연상케 하는 고난도 액션기술을 구사하며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서연을 연기한 유혜리는 <우묵배미의 사랑>을 통해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유혜리가 연기한 서연이 억척스런 아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최명길이 맡은 공례는 조용하고 청순가련한 여인을 대표하는 캐릭터였다. 공례는 남편 몰래 일도와 바람을 피면서도 마치 한 번도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굉장히 수줍게 행동한다. 일도가 가정으로 돌아간 후 둘만의 추억이 있는 비닐하우스에 여러 차례 찾아갔던 공례는 결국 사랑이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임을 깨닫고 일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1980년대 <뽕> <변강쇠> <연산군> 등에 출연하며 그 시대 '강한 남자'를 상징했던 이대근 배우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공례의 남편 석희를 연기했다. 석희는 밖에서는 조용하고 신사적이지만 집에서는 아내 공례에게 폭력을 일삼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얌전하던 공례가 외간남자인 일도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당시 이대근이 충무로에서 차지했던 위치에 비하면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출연분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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