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격변기의 청년시절
[김삼웅 기자]
▲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전사한 조선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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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기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양반 자제들은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를 보고 급제하면 관리가 되었지만, 하층민들은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농사꾼이 되거나 보따리상(보부상) 노릇이 주어졌을 뿐이다. 농토를 잃게 되면 화전민이 되거나 화적이 되기도 했다.
춘암은 곤궁한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접고 부모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다행히 심신이 건강하고 근면해서 농사일도 잘 하고 성장하면서 기골이 장대하여 지역의 씨름판에 이름을 날리고 걸음이 빨라서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청년기 춘암은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로 주위의 평판이 좋았다. 춘암은 천성이 순박하고 과묵한 편으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도 않았고 남이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스스로 행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글을 읽고 사색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춘암의 모습에 친구들은 "자네는 일만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춘암은 이런 말을 들으면 "일이란 모두 그 때가 있는 법일세. 비록 이런 일이라도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지. 그때 가서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열심히 일하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주석 1)
춘암은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세상에 관심이 많아 쉴 때에는 덕산, 홍성, 예산 등 인근 고을을 찾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한편 여론도 수집하면서 촌음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주석 2)
강직한 집안 분위기는 청년 춘암을 정의감을 갖게 만들었다. 춘암이 여론의 추이를 살피기 위해 다니던 중 하루는 덕산장에서 씨름판이 벌어져 삼일 째 대마루판에서 장사 한 사람이 상대를 모조리 이기고 기고만장해서 "나를 당할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나오라"며 큰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꼴이 어찌나 방자하고 교만하게 보였던지 춘암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혼쭐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씨름판에 들어섰다. 서로 샅바를 감아쥐고 당기는데 상대가 별 실랑이 할 것도 없을 정도여서 거구의 상대방을 일순간에 모래판에 거꾸로 처박았다. (주석 3)
이렇듯 춘암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의롭지 못한 행위를 참지 못 하는 정의감을 갖고 있었다. (주석 4)
시골 청년의 눈에도 세상은 난세였다. 주자학(성리학)은 모화사상과 허례허식에 빠져들고 갈수록 교조화되면서 나라는 기울고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이런 틈새에 <정감록> 등 도참설이 횡행하여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그는 많이 배운 바는 없지만 사리분별력과 남다른 정의감을 갖고 있어서 시국에 대한 대처 방안을 골몰히 찾기 시작했다.
춘암은 청년기에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대상을 맞닥뜨렸다.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토호들의 노략질로 인해 농촌을 떠나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들 가운데에는 도적이 되어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이러한 대내외적 혼란을 지켜본 춘암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상보다 차원이 높은 제세안민의 방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춘암은 사람들과 달리 당장의 호구책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안락하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는 사람에게 당장 생선을 나누어주는 일은 임시방편이며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다 깊은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주석 5)
그가 이같은 이상을 그리게 된 것은 서당식 제도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당시의 유학이 낡은 유교 체제에 순응하는 난쟁이 교육으로 시종일 때, 그는 야인의 눈으로, 야성의 심경으로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가 8세 때인 1863년 11월 동학교주 최제우가 체포되었다. 12월에는 고종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부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3월 최제우가 대구감영에서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춘암은 아직 동학에 입도하기 전이므로 그의 처형에 관해 잘 몰랐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기 어렵다.
오랫동안 야인생활을 했던 대원군은 칼을 뽑았다. 임진왜란 때 파병해 준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냈던 만동묘의 철폐령을 내리고,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 중건을 지시했다. 왕권의 권위를 높이려는 이유였다. 만동묘 철폐령에 전국의 유생 1468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66년 천주교 교인을 탄압하는 병인박해가 자행되고, 이에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군함 2척과 병력 6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병인양요 직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 가까이까지 진입했다가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이 사건의 보복으로 미국 대통령 그란트가 조선 원정안을 승인하였다. 조선의 근대사는 이를 신미양요라 풀이한다.
주석
1> <춘암상사①>, 41쪽.
2> 앞과 같음.
3> 앞과 같음.
4> 조극훈, <춘암 박인호의 동학사상과 역사인식>, <동학학보>, 제68호(2023.12), 49쪽, 동학학회.
5> <춘암상사①>, 41~42쪽.
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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