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K팝의 적나라한 그늘, 이 아이돌이 겪은 현실

김성호 2024. 6. 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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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39]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힘을 낼 시간>

[김성호 기자]

힘내. 수시로 듣게 되는, 또 수없이 하게 되는 말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을 꼽으란 문제가 있다 치면, 힘내라는 말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을 정도다.

힘을 내란 말이 그토록 많이 쓰이는 건 우리네 삶 가운데 힘을 내야만 할 일이 많다는 뜻일 테다. 수시로 상처입고 때때로 무너지는 고단한 인생사 한 가운데서, 어쩌다 한 차례씩 지나칠 뿐인 타인에게 힘내란 말밖엔 무엇을 더 건넬 수가 있으랴.

그러나 힘내란 말이 언제나 효과를 발하는 건 아니다. 힘을 내란 말은 표면적으로 듣는 이에게 힘을 낼 책무를 부과한다. 힘을 내는 주체가 듣는 이라는 뜻이다. 그가 힘을 내고 싶지 않아 안 내는 것이 아닐 텐데, 외부에서 힘을 내라는 말을 반복해 들을 경우 도리어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힘이 나지 않는, 힘을 낼 수 없는 현실에 도리어 좌절하게 된다는 뜻일 테다.
 
 영화 <힘을 낼 시간> 스틸컷
ⓒ JIFF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청춘들의 여정

남궁선의 102분짜리 장편영화 <힘을 낼 시간>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청춘들이 다시 한 번의 날갯짓을 다짐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외부로부터의 '힘내'가 아닌 자기 안에서의 '힘내'란 목소리를 끄집어내기까지, 그 여정이 적잖이 안쓰럽고 대견하다.

훌쩍 떠난 여행길, 뒤틀리는 계획 사이로 상처 많은 친구들이 저와 제 상태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는 성장영화의 얼개를 가졌다. 여행 속 성장이란 자칫 흔한 소재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견지하는 진지한 자세가 보는 이에게도 자못 진지하게 작품을 대하도록 만든다.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가 15년째 이어오고 있는 인권영화 프로젝트로 제작된 작품이다. 세상 만사가 그러하듯 세계 만방에 그 위용을 자랑하는 K팝에도 어두운 측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두움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 우리가 오로지 빛에만 주목하는 사이, 그 어두움엔 곰팡이가 슬고 마침내 곪아 터지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인권위가 K팝, 그 중에서도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아이돌 산업에 주목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힘을 낼 시간> 스틸컷
ⓒ JIFF
 
빛좋은 개살구... K팝 아이돌의 현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세상 모든 것을 재화로 다룬다지만 결코 그것이 자연스런 일은 아니다. 특히 인간은, 그 존엄이며 존엄과 맞닿은 육체와 노동은 그저 재화로 다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법을 비롯하여 여러 법률과 규칙으로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러한가. 법망을 교묘히 피하여 인간을 착취하고 삶을 부수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하다. 아이돌 산업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영화는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친구 셋의 제주도 여행을 그린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아이돌로 데뷔하여 제법 오랜 기간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현실은 아이돌에 대한 흔한 인상과 달리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 연예인임에도 얼굴이 얼마 알려지지 못한 것부터가 그렇다. K팝 마니아에겐 조금쯤 알려졌으나 그 시장을 벗어나면 그들을 알아보는 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의 성공, 그만한 유명세, 그만큼의 대우. 그러나 아이돌 산업 아래 대부분의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다.

많은 여행이 그러하듯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다. 도착 첫날부터 계획은 틀어진다. 조금 심한 설정이긴 하지만, 공항에서부터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 그 시작이다. 다음은 버스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겨우 맞이한 식사시간에 다른 테이블 손님과의 싸움에 휘말려 합의금으로 여행비용 거의 전부를 쓰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나 싶다.
 
 영화 <힘을 낼 시간> 스틸컷
ⓒ JIFF
 
길을 잃어버리면 비로소 여행

선조들은 지혜롭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또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나온다던가. 무튼 한민족의 후예인 이들 세 친구는 하룻밤 지낼 돈도 없는 처지 가운데서도 제주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감귤농장에 귤을 따는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고, 계약된 숙소를 팔아 또 돈을 쥔다. 어찌어찌하여 제주에서의 일정을 이어가며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비로소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이들의 여행이 꼭 그렇다. 아이돌 생활을 하며 친해진 이들끼리 정을 나누자며 준비한 여행길이, 그 이상의 감흥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지내면서도 쉬이 터놓지 못했던 마음들이 나눠지고, 바닥까지 추락하였다가 땅을 짚고 일어서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이들이 지나온 길은, 그대로 <힘을 낼 시간>이 진짜로 내보이고 싶은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는 이들이 일찍이 겪었을 삶, 즉 K팝 아이돌로서의 현실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수년의 노동에도 정산이 이루어지기까지 전혀 수익을 얻을 수 없는 불합리한 계약, 과다한 노동시간과 강도, 짧은 바지를 입어야 해 생리도 할 수 없었던 고충, 불명확한 미래와 그에 따른 정서적 불안까지 아이돌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이 관객 앞에 펼쳐진다.

겉으로 보면 화려하게만 보이지만 실상은 승자독식의 투전판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것이 어디 아이돌의 이야기일 뿐일까. 우리는 스포츠에서도, 문학이며 영화, 또 온갖 예술분과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있는 것이다. 상위 1%가 모든 부와 명예를 가져가는 세상, 그 성취를 얻기까지 거듭 절망해야 하는 현실 같은 것들 말이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힘을 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를 이 영화는 돌아보도록 이끈다. 일부 대형 기획사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군소 기획사에선 공공연히 벌어지는 부조리가 적잖다. 인권문제의 개선은 이같은 작업과 조사, 처벌, 투쟁들을 통해서 겨우 한 걸음씩 나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인권영화라는 이름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벌써 십수 차례 영화제작을 이어온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있을 테다.

<힘을 낼 시간>의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은 영화가 그저 아이돌의 이야기에, 또 예체능 부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미 공고히 구축돼 있는 기성체제에 착취당하고 부서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힘을 내보기로 결의하는 청춘의 드라마다. 그저 허울 좋은 낭만이며 방종으로 빠지는 대신, 엄혹한 현실에 발을 딛고 젊음이란 자산으로 일어서는 이야기다.

세상엔 정말이지 힘을 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 가장 힘 빠지는 순간에서도. 부서질 것 같은 순간에도, 스스로 또 함께 힘을 내자고 서로를 북돋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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