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도 "속았다"…필리핀 근로자 울린 '미스터 김 사건' 전말 [사건추적]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농촌 인력난’을 해소할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한 해외 브로커, 일명 ‘미스터 김’이 구속 송치됐다. 이 브로커와 범행을 공모한 전직 지자체 직원은 먼저 검거돼 검찰에 넘겨졌다.
이들은 해외 행정당국과 직접 접촉하기 어려운 코로나19 상황 속 농촌 일손부족 문제를 고민하던 국내 지자체에 계획적으로 접근해 사업에 관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지자체 담당자는 “우리가 속았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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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브로커 ‘미스터 김’…이면계약 등 서류 꾸며
법무부 창원출입국·외국인사무소(출입국사무소)는 필리핀 현지 브로커인 한국인 A씨(50대)를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허위초청 등의 금지)로 구속 송치했다고 1일 밝혔다. 계절근로자 관련 브로커 구속은 이번이 처음이다. 출입국사무소는 A씨와 공모한 전직 경남 거창군 기간제 근로자(계절근로자 모니터링 담당) B(50대)씨도 지난해 5월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겼다.
A씨는 2022년 4월부터 9월까지 거창군에서 계절근로자로 일할 필리핀인 138명의 허위 초청을 알선하고, 그 대가로 이들 급여 일부를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출입국관리법은 거짓된 사실의 기재나 거짓된 신원보증 등 부정한 방법으로 외국인을 초청하거나 그러한 초청을 알선하는 행위(허위 초청)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출입국사무소에 따르면 브로커 A씨는 필리핀 타를락주 푸라시에서 현지인을 모집, 비자 발급을 위해 푸라시→거창군→출입국사무소로 제출할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표준근로계약서에는 정상 급여인 월 156만원으로 썼지만, 실제로는 82만원만 지급하기로 한다는 이면 계약서를 따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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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해본 적 없는 외국인도 보내
심지어 서류를 위조한 정황도 포착됐다. 계절근로자를 국내 초청하려면 농사 일을 했다는 현지 행정당국이 발급한 ‘농업 종사 확인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농사 일을 해본 적 없고, 거창군과 계절근로자 유치 협약을 맺은 푸라시의 주민도 아닌 필리핀인 79명한테 가짜 농업 종사 확인서를 만들게 한 뒤 비자를 신청하게 했다.
출입국 사무소 관계자는 “제대로 된 문서와 양식이 다르고 현지 지자체 상징 문양도 약간 다른 것으로 봐서, 정식 문서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며 “A씨는 함구하고 있는데, 필리핀 근로자들은 브로커가 다 만들어줬다고 진술한다”고 했다.
국내에 있던 당시 거창군 직원 B씨는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이 입국하면 급여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통장을 모두 빼앗아 보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농가주가 계절근로자 통장에 월급 156만원을 입금하면 B씨가 현금으로 인출, 56만원을 빼돌려 A씨와 반반 나눠 가졌다. 나머지 100만원은 A씨에게 송금했는데, A씨는 이 중 18만원을 현지 로비 자금으로 쓰고 82만원은 계절근로자에게 다시 보냈다.
국내 공범은 군 직원…통장 빼앗아 급여 일부 ‘꿀꺽’
A씨는 수사기관의 자금 추적을 피하려고 이렇게 가로챈 8400여만원을 배우자 명의 계좌로 빼돌리는 치밀함도 보였다. B씨도 약 4000만원의 수익을 챙겼다고 인정했지만, 출입국사무소는 A씨와 비슷한 금액을 가로챘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들의 범행은 2022년 10월 꼬리를 잡혔다. 당시 출입국사무소는 거창군에서 무단 이탈한 일부 계절근로자들을 붙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월급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수상히 여겨 수사에 착수했다. 이들 계절근로자는 농장주가 주는 월급보다 자신이 받는 돈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화가 나 이탈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출입국사무소는 거창군 직원 B씨를 먼저 붙잡아 불구속 송치했다. 허위 초청으로 입국한 필리핀인 138명 중 이미 출국한 126명을 뺀 나머지 8명도 적발해 강제퇴거 조치했다.
필리핀 현지에 머물던 A씨도 수사 착수 1년 7개월 만인 지난달 17일 체포됐다. A씨는 국내 사정을 모른 채 눈 수술을 받으러 국내에 들어왔다가 출입국사무소에 덜미를 잡혔다. A·B씨는 2022년 10~11월쯤 범죄수익금을 두고 ‘돈이 맞다, 안 맞다’며 다투다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A씨는 “대한민국 농번기 잘 보내게 하려고 근로자 소개해준 것이지 사리사욕 채운 게 아니고, 잘못한 게 없다”며 “내 인건비 200만원만 챙기려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사리사욕 아냐”라더니…사업 초기부터 접촉
출입국사무소 조사 결과, A·B씨는 필리핀 현지에서 사업을 하다 알게 된 사이다. 둘은 거창군이 2021년 10월 푸라시와 ‘계절근로자 유치 업무협약’을 맺기 전부터 범행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조사됐다. 필리핀에 있던 A씨가 코로나19로 경기가 좋지 않자 먼저 귀국한 B씨에게 연락, 범행을 제안했다. 수익금 배분 등 6쪽 짜리 사업계획서도 보여줬다고 한다.
개인적인 연고로 거창군에서 머물던 B씨가 군에 접근, 계절근로자 유치 사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때마침 농촌 일손부족 문제를 고민하던 군이 적극 나서면서 푸라시와 업무협약이 체결됐다. 이듬해 4월 푸라시 계절근로자가 입국하기 전인 3월 B씨는 군 직원으로 채용돼 계절근로자 관련 업무까지 봤다. 해외에선 A씨가 국내에선 B씨가 나서, 두 시·군 간 다리를 놔준 셈이다.
거창군 관계자는 “죄송한 얘기이지만 우리가 속았다”며 “(코로나19 당시이던) 2021·2022년에는 (중개인 없이) 해외 현지에 직접 접근하기도 어려웠고, 지자체가 다른 나라에서 MOU 맺기도 쉽지 않았다. 초창기 부작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B씨 채용은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다른 지원자도 있었는데, 너무 연로한 탓에 B씨가 됐다”고 전했다.
불법 걷어내자 ‘순항’…무단 이탈도 사라져
이번 문제로 거창군과 푸라시 간의 계절근로자 교류는 A·B씨가 빠지면서 차츰 정상화됐다. 거창군-푸라시는 지난해 4월 재협약을 맺으면서다. 양 지자체는 외국인 근로자의 중개인 임금 갈취와 인권 침해, 무단 이탈을 막기로 약속했다. 푸라시는 올해 4월 현지 공무원을 거창군에 직접 파견하기도 했다. 이 직원은 계절근로자 관리·지원 업무를 맡고 있다.
계절근로자와 거창군 농가주들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브로커의 중간 착취가 사라져 임금을 제대로 받자, 외국인 근로자 무단 이탈도 발생하지 않았다. 지난해 푸라시 계절근로자 174명이 온 데 이어 올해도 250여명이 거창군에 온다. 거창군 관계자는 “현지에서 500명이 넘는 대기자가 줄을 설 정도로 인기”라며 “거창의 딸기·사과 농가에서 주로 일하는데, 워낙 일을 잘해 농가에서도 반긴다”고 했다.
출입국사무소는 국내 입국한 필리핀·베트남 등 15개국 계절근로자들을 상대로 하는 브로커의 허위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가짜 농업 종사 확인서 제출 알선 행위, 급여 통장을 압수하여 임금을 착취하는 등의 범행이 다른 지자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해외 현지 공무원과 브로커 간 유착 여부 등 수사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거창=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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