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태원측 "판결문 비공개" 요청…김시철 재판장 거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측이 2심 재판부의 1조 3808억원의 재산분할 선고 직전 ‘판결문 비공개’를 요청했지만 재판장인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59·연수원19기)가 수용 안 한 것으로 파악됐다. 1심이 같은 최 회장 측 요청을 받아들여 판결문을 비공개한 것과 대조적이다. 법원 안팎에선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는 김 재판장의 성격이 드러난 장면”이란 평이 나왔다.
지난달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 재판장이 이끈 서울고법 가사2부는 전날인 지난달 30일 오후 2시 소법정 576호에서 최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의 이혼소송 2심 선고기일을 열었다. 이혼 소송 사상 최대 재산분할액은 김 재판장이 법대에 앉자마자 예고됐다. 판결 요지 낭독에 앞서 김 재판장이 “판결문이 길어 (선고에 앞서) 판결 이유부터 먼저 설명할 건데, 항소심 결론의 큰 틀은 ‘(1심의) 위자료 1억원은 지나치게 낮다’와 ‘재산분할 대상은 1심에서 좁게 잡아서 확대한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최 회장 측이 긴박하게 ‘선고 이후 판결문 열람을 원천 금지해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가사 사건은 법원 예규상 일반인의 판결문 열람은 원래 금지된다. 최 회장 측은 여기에 더해 “법원 전산망을 통한 법관들의 열람권도 원천 차단해달라”는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노 관장 측은 “법원 내부 열람까지 막으면 안 된다”는 의견서로 맞섰다.
‘판결문 열람’을 두고 양측 물밑 신경전이 벌어지던 사이 김 재판장은 50여분 간 요지 낭독을 마친 뒤 “최 회장은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해라”고 선고했다. 그러곤 법정에서 퇴장하자마자 지체 없이 판결문을 법원 전산망에 공개했다. 최 회장 측의 ‘판결문 원천 비공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통상 판사들은 선고 이후 판결문을 내부 전산망에 등록한다. 이렇게 등록된 판결문은 동료 판사들 사이 자유롭게 열람이 가능하다. 일반인의 판결문 열람 절차가 까다롭고 종종 제한받는 것과 달리, 판사들의 열람이 손쉬운 것은 재판 과정에서 법리·사례 등을 연구하고 참고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가사소송의 경우 판사들의 열람권조차 원천 봉쇄되는 경우가 있다. 최 회장처럼 당사자가 ‘법원 내부 열람 금지’ 요청을 제기할 때다. 법원 내부로부터 구설이 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대개 유명인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 재판장이 이를 받아들이면 판결문은 게시되지 않는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 간 이혼 소송이 대표적이다. 2020년 1월 임 전 고문 몫으로 141억원의 재산분할액이 확정됐지만, 현재까지 법원 내 판사들의 판결문 열람도 봉쇄돼있다.
법원 관계자는 “내부 전산망에 판결문을 올리지 말라는 요청은 당사자여도 법적 권한은 없는 요청”이라면서도 “다만 재판장의 재량에 따라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고 설명했다.
김 재판장이 최 회장 이혼 소송 1심 재판부와 달리 판결문 비공개 요청을 불수용한 것과 더불어 약 200페이지 분량인 2심 판결문 내용도 법원 내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2심 판결문은 ‘현대사 다시 읽기’ 수준으로 6공화국 시절을 살핀 판결문”이라고 촌평했다. 법정에서 밝힌 노소영 관장의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SK그룹 성장하기까지 유·무형적 기여와 후광”에 관해 훨씬 많은 사실과 주장, 판단을 망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관계자는 “이미 법정에서 판결의 핵심적 내용을 쏟아내지 않았나”며 “김 재판장이 최 회장 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판결을 법원 내부에 작심한 듯 선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선고 직후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노 관장 측의 일방적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하나하나 공개했다”며 “단 하나도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편향적으로 판단한 것은 심각한 사실인정의 법리 오류이며, 비공개 가사재판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행위”라고 반발했다.
김 재판장이 선고 당일 사실상 2심 심리 과정을 50여분에 걸쳐 자세히 설명한 것부터 이례적인 일이다. 이혼 소송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통상 재산분할액 등 최종 결정만 공개하는 게 일반적이어서다.
2심 재판부는 인지대, 변호사비 등 일체의 소송비용도 최 회장 측에서 70%를 부과하라고 판단했다. “각자 쓴 만큼 부담하라”고 판단한 1심과 달랐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통상 최근 가사 소송들에선 ‘소송비용 각출’을 명령하는 게 트렌드”라면서도 “그럼에도 2심 재판부가 노 관장 측이 '이혼 소송을 당한 피고임에도, 1·2심에 걸쳐 재산분할청구액에 비례해 100억원 가까운 인지대 비용을 혼자 부담해야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을 인정해 준 것”이라고 했다.
2심은 1년 3개월 심리 기간 중 검토 기록만 3만4700쪽으로 1심보다 4배 정도 많은 양을 살폈다. 또 석명요구(법원이 사건 진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당사자에게 추가 설명 기회를 주고 입증을 촉구하는 행위)가 단 두 차례에 불과했던 1심과 달리, 양측에 무려 28차례 석명을 요구했다.
김시철 재판장은 앞선 판결에서도 혼인 파탄에 책임이 큰 유책 배우자의 책임을 폭넓게 물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1월 ‘상간자에 사용한 돈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하고 ▶같은 해 6월 ‘유책 배우자에게 이혼 소송을 당했을 경우 더 큰 액수의 위자료 인정’하며 ▶11월엔 부부 중 일방이 혼인 기간 중 단독 명의로 취득한 주식이라도 다른 배우자가 기여했다면 재산분할 대상’이라고 판결했다. 이런 법리는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항소심에서 고스란히 적용됐다. 김 부장판사는 오는 8월 퇴임하는 민유숙·김선수·이동원 대법관의 뒤를 이을 55인의 대법관 후보자에 포함돼 있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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