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는 왜 무슬림 소년 필요했나…정화 함대를 보는 시각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4>]

김기협 2024. 6.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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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정화 함대의 남양 항해(1405-1433)는 대륙국가 중화제국에서 이례적인 사업이었다. 이 항해 활동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기가 가진 함의를 먼저 살펴야 하겠다. 이 항해가 시작된 것은 영락제(1402-1424)가 제위에 오른 후 4년째, 명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후 38년째 되던 해였다.

영락제는 3년간의 치열한 내전을 거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년에는 내전 피해의 회복에 바빴다. 함대 건설 같은 거대한 사업에 바로 착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락제 사후 해금 정책이 자리 잡으면서 이 사업을 폄하하는 분위기 속에 영락제의 펫 프로젝트였다는 인식이 일어났는데, 함대의 규모를 본다면 영락제 즉위 이전에 방향이 이미 잡혀 있던 사업일 가능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나라의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왕조 교체 후 38년이라면 새 왕조의 특성이 확정되기에 충분한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원-명 교체에는 일반 왕조 교체에 비해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원나라의 왕조 성격에 일반 중화제국과 크게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가장 특이한 점은 중국의 전통적 ‘천하’ 관념을 벗어난 데 있었다. 정복 활동을 통해 지리적 지식이 크게 넓혀져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일칸국 등 다른 칸국과의 관계도 전통적 ‘천자국’보다는 수평적이었다.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 입장에서 원나라의 유산을 어느 범위로 받아들일지 고민이 필요했다.

황제가 되기 전에 오랫동안 연왕(燕王)으로 몽골세력과 대면해 온 영락제에게는 원나라 유산이 크게 보였을 것이다. 유가 관료가 중심이 된 남경 조정에 비해 영락제가 연왕 시절이나 즉위 이후나 환관의 역할을 중시했다는 지적이 있다. 당시의 환관은 색목인을 비롯해 다양한 배경의 인재를 포괄하는 집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북방에서만 살고 활동했던 영락제에게 항해 활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것이 이 색목인-환관 집단이라는 추측은 정화에게 큰 책임을 맡긴 사실로 확인된다. 정화 함대의 활동에 관한 실록 등 공식 기록이 너무 적고 내용이 어지러워서 그 의미를 폄하하려는 의도적 노력이 있지 않았나 음모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정화 본인에 관해서는 비문 등 확실한 자료가 꽤 있다. 정화의 출신 배경부터 살펴본다.

정화(1371-1433?)가 태어난 윈난성은 몽골세력이 제일 늦게까지(1381) 버틴 곳이다. 이곳을 평정한 부우덕(傅友德, 1325-1394)이 마(馬)씨 성의 이 소년을 거세한 후 연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부우덕은 연왕의 장인 서달(徐達, 1332-1385)의 부관으로 연왕의 영지에 오래 주둔한 터라서 연왕과 각별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연왕 시절 영락제가 얻은 무슬림 소년 노비


제위에 오른 영락제에게 정(鄭)씨 성을 하사받은 직후에 정화가 세운 부친의 묘비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윈난 색목인의 최고 명문가였다. 쿠빌라이칸이 윈난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정복한 후(1274) 보낸 초대 다루가치가 정화의 5대조였고, 조부와 부친의 호칭에는 성지순례(Hajj)의 경력이 나타나 있다. (당시에는 하지를 행하는 사람의 수가 적었고 매우 큰 종교적 권위가 인정되었다.)
정화의 고향에 세워진 정화 부자의 모습.

부우덕이 연왕에게 보내준 정화는 일개 노비 소년이 아니었다. (정화의 부친은 명군에 항거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측되고, 그 자제를 살려내기 위해 거세는 꼭 필요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나라 잔존세력과 대치하고 있던 연왕이 원나라 체제의 엘리트 자제를 참고자료로 삼도록 윈난에서 북경까지 데려왔을 것이다. 연왕이 이 소년에게 최고의 교육을 베풀어 측근으로 삼은 것은 그런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영락제가 정화를 최고위 환관직인 태감(太監)으로 등용한 원인이 어느 전투에서 세운 어떤 공로에 있었나 따지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억측 같다. 정화의 가치는 전술 차원이 아니라 전략 차원에 있었다. 그의 출신 배경은 색목인 집단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색목인 집단의 역량을 동원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능력이었고, 그를 통해 이뤄낸 성과가 남양 항해였다. (부친 묘비를 세워 자신의 배경을 밝힌 것도 이 목적을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많은 색목인이 중국 남해안-동남해안 각지에 자리 잡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항해술, 해외 정보와 연줄 등 이 집단이 보유하고 있던 유-무형 자산이 남양 항해 사업의 밑천이 되었고, 그 자산을 끌어모아 함대를 조직한 것이 정화의 역할이었다. 정화 함대의 배 크기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거니와, 하드웨어로서 선박의 규모와 성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참가자들의 인적 구성이라는 소프트웨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남양 항해에서 정화의 역할을 현대의 우리는 함대사령관으로 보지만 당시의 공식적 역할은 황제의 사신이었다. 사신이 군주를 대리하는 범위는 그 사명(使命)에 명시된다. 그런데 정화의 사행에서는 현지 사정을 미리 파악하는 데도 제약이 있었고, 마주친 상황에 따라 새 지시를 받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백지 조서(詔書)를 가져가 상당한 범위의 사안을 재량껏 처리했다.


팔렘방의 중국인 집단에 대한 정화의 조치


정화 함대는 막강한 병력을(보통 2만 명 이상) 갖추고 있었으나 무력 사용을 최대한 억제한 것으로 보인다. 첫 항해(1405-1407) 초입에 자바에서 현지세력의 습격을 받았으나 착오에 따른 일이었다고 사죄하고 들어오자 별다른 보복 없이 받아들였다.
김영옥 기자
수마트라섬의 파사이에 정화함대가 하사품으로 전달해 준 이 종은 아체막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자바섬 수라바야에는 정화를 기념하는 중국풍 모스크가 있다.

첫 항해에서 눈에 띄는 군사작전은 수마트라섬 팔렘방의 ‘해적’ 진조의(陳祖義) 토벌이다. 함대가 나가는 길에 팔렘방에 들렀을 때는 진조의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길에 들렀을 때 그의 귀순이 거짓이라 판정해서 토벌하고, 그를 고발한 시진경(施進卿)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했다.

수백 척의 배로 넓은 해역을 누비면서 1만여 척 배를 덮쳤다느니, 토벌 때 5천 명을 죽였다느니, 진조의에 관한 기록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많은 중국인이 남양 지역에서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광둥(廣東) 출신의 진조의나 항저우(杭州) 출신 시진경처럼 중국 남해안 출신이 많았다. 두 사람의 활동 양상에 별다른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두 사람과 함께 활동하던 난하이(南海) 출신의 양도명(梁道明)은 정화 함대를 따라 중국에 돌아가 은퇴했다. 시진경 중심으로 현지의 중국인 세력을 재편하면서 이에 저항한 진조의를 악당으로 그린 것 같다.

시진경이 무슬림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남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해안지역의 교역 집단 사이에 이슬람이 확산되고 있었다. 정화를 비롯한 함대 지도자들이 향후 남양의 중국인 교역 활동에 시진경 같은 무슬림을 앞세우는 편이 유리하겠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다.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팔렘방에 들렀을 때와 돌아오는 길에 들렀을 때 사이에 1년 남짓 시차가 있었다. 조정에 중간보고를 올리고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팔렘방 일대의 중국인 집단 지도자들의 처리 방법은 조정(또는 황제)의 승인 없이 적당히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처리했고, 진조의를 현장에서 처단하지 않고 조정으로 압송한 것이라 생각된다.


항해 사업의 뒷받침을 위한 마환의 기록 작업


정화 외에도 함대 지도자 중에 무슬림이 여럿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슬림으로서 그들의 역할이 드러난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고위직은 아니라도 역할이 뚜렷했던 사람으로 마환(馬歡, 1380?-1460)이 있었다. 정화 함대의 일곱 차례 출동 중 세 차례(4차, 6차, 7차) 참가했던 마환은 그 견문을 〈영애승람(瀛涯勝覽)〉으로 남겼다.
1617년의 출판물에 수록된 〈영애승람〉. 저자 마환은 항저우 출신 무슬림으로, 정화 함대에서 일개 통역의 신분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화 함대의 기록으로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槎勝覽)〉과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誌)〉가 있으나 마환의 기록과 정밀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환의 직책은 통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사관(史官)의 역할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본인의 목적의식만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도움 없이는 그렇게 정밀한 기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튜어트 고든은 〈아시아가 곧 세계였던 시대 When Asia was the World〉(2008)의 한 챕터에서 마환을 집중 조명했다(117-135쪽). 고든은 마환의 기록이 통상적 기행문과 달리 디테일에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중국인 정착지를 그린 아래 인용문은 마환의 관심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원래는 모래언덕일 뿐이었다. 중국에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했기 때문에 신촌(新村)이라 부른다. 지금 촌장은 광둥에서 온 사람이다. 1천 가구가 넘는다. 온갖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교역을 하러 온다. 황금과 보석, 그리고 온갖 외래품이 대량으로 거래된다.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다.”

Stewart Gordon, When Asia was the World. 넓은 범위를 다룬 책이어서 정밀성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전반적 균형감각이 훌륭하다. 마환을 다룬 챕터도 요점을 잘 짚은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정책에 참고될 것을 바라는 서술이기 때문에 마환의 관심을 공적인 것으로, 그의 역할을 사관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정화는 이런 기록이 조정에서 논의되고 실록에 기록되기 바라는 뜻에서 그를 채용하고 기록 작업을 지원한 것 아닐까? 마환이 70세가 넘어서야 〈영애승람〉을 출간한 사실에 생각이 머문다. 작성 당시부터 염두에 두었던 공적 활용의 길을 끝내 포기하면서 사적 출판으로라도 세상에 남길 결심을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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